코로나가 생각난다. 페스트를 코로나로 오랑시를 대구시로 대체해도 무방하리만큼 상황이 비슷하다.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은 반복되고 그에 대처하는 방식 역시 똑같다. 나는 2020년 3월 아비규환 현장을 직접 경험했는데, 코로나19가 공식적인 전염병으로 발표 나자 급작스레 보건소로 파견을 가게 된 것이 이유였다. 그곳에서 전화상담반에 배치되어 쉬지 않는 전화를 온몸으로 받아냈다. 24시간 근무, 연중무휴로 변해버린 보건소 운영에 우리 직원들은 주·야간 조를 짜서 교대근무를 했다. 그 당시 전화벨 소리만 들어도 진저리가 났고 불안에 떠는 주민들의 우울함과 신경질에 너무 지쳐 집에 오면 녹초가 되었던 기억이 있다. 아마 페스트 진료를 하던 리외도 나와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피로를 견딜 수 없는, 그래서인지 전염병에 대해 점점 더 무관심해지는 현상. 뉴스를 보면서도 ‘오늘은 확진자가 더 늘었네.’ 무기력하고 건성인 태도. 그때의 내가 그랬다. 아마 오랑시 시민들도 그랬을 거다.
카뮈는 부조리를 고발한 작가이다. 페스트가 전염병에 국한되는 게 아니라 부조리한 상황을 모두 의미한다고. 이런 상황을 헤쳐가기 위해 선한 영웅 역할의 의사 리외, 장타루, 조제프 그랑을 설정하고 반대쪽에는 악인인 코타르를 두었다. 그리고 가장 입체적 인물인 신문기자 랑베르까지. 사랑하는 여인을 핑계로 오랑시를 떠나려 했지만 결국 선한 이들과 함께하기로 마음이 움직였다. 선의 역할에 선 주인공들의 공통점은 성실함이다. 마치 시시포스처럼 그저 자신에게 주어진 업무를 바윗돌 밀어 올리듯 묵묵히 수행해 나간다. ‘부조리라는 추상’을 악인 코타루로 재현함으로써 그를 체포하는 것으로 소설은 끝나는데 이것도 권선징악의 요소이다. 악이 선에게 응징당함으로써 끝나는 결말이니까.
페스트를 전염병이 아니라 전쟁이든 계엄이든 정상 범위에서 벗어난 어떤 것으로 바꿔서 생각해도 상황에 지배되는 개인의 행동의 양상은 비슷할 것이다. 전쟁통에도 리외가 있고 코타르가 있으며 시민들은 우왕좌왕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책이 지금도 계속 읽히는 게 아니겠는가.
이런 부조리함이 지배하는 상황에서 나는 위의 주인공 중 누구와 가장 닮았을까. 없다. 그저 난 소시민에 불과한 사람이다. 리외처럼 책임감 때문에 직업의식이 투철한 사람도 아니고 장타루처럼 어떤 계기로 인해 성자처럼 살아야겠다는 마음도 없다. 그저 전염병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는 랑베르에 가장 근접하려나?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이 나와 비슷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작가는 묵묵히 인내심으로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리외와 장타루를 주인공으로 만들었으리라. 부조리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 개인이 가져야 할 태도는 ‘이래야 한다’고 보여주면서.
카뮈는 “진정한 인간이 되기 위해서는 개인의 행복을 넘어 타인과 연대하는 공동체 의식”이 가장 이상적이라고 했다. 진정한 ‘추상’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그토록 이상적이지만 비현실적인 소시민들의 귀감이 되는 영웅 주인공을 만들었나 보다. 위인전이나 전래동화이야기처럼 느껴지리만큼 명백한 선과 악의 대비, 권선징악, 주인공들이 너무 이상적이어서 잘 와닿지 않았다. 실상 현실에서는 코타루들이 판을 치고 있는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