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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에서 기념품대신 담아 올 것은

'쇼핑해야 해'마음을 비워보다

by 미니멀파슈하

나는 여행을 좋아한다. 그중에서 특히 여행가방 싸는 게 너무 좋다. 여행가방에는 옷과 화장품만 싸는 게 아니고, 설렘과 기대를 함께 담는다.


게다가 미니멀라이프 시작하고 나니, 최대한 짐을 빼서 조그맣게 여행가방 싸는 것이 나만의 챌린지가 되어버려 괜히 더 재미있다. 시간이 남을 때마다 남들은 가방에 무얼 담아가나 영상을 찾아보기도 하고, 얼마나 더 뺄 수 있을지도 연구한다. 미니멀캐리어학과가 있다면 당장이라도 편입하고 싶은 마음이다.



연구결과 현재 여기까지왔다. 2박3일 화장품. 아마 일주일정도까진 가능하지 싶다.



나라고 해서 처음부터 이렇게 짐을 쌌던 건 아니다. 대학생 때 했던 첫 해외여행 때는 26인치 캐리어에 옷과 비상식량등을 가득 채워갔더랬다. 가난한 학생의 신분인지라 갈 때 올 때 짐이 거의 동일했다. 쇼핑을 못했단 소리다. 게다가 여행 초중반 시기에 카메라를 소매치기당하는 바람에 남는 사진도 없었다. 첫 해외여행, 게다가 유럽에 왔는데 사진을 안 찍고 돌아다닌다...? 처음에는 너무 속상했는데, 남은 일정까지 우울하게 다닐 순 없었다. 툭툭 속상한 마음을 털어버렸다. 그랬더니, 세상에. '사진 찍어야 해' 강박 없는 여행이 이렇게 편할 줄이야.



신혼여행 때는 회사에 돌릴 선물을 구입하는 게 일종의 미션이었다. 스위스에 갔으니 그 지역 특산품인 초콜릿을 잔뜩 샀는데, 퀄리티 좋은 초콜릿은 무게가 상당하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짐이 너무 늘어나는 바람에 신혼여행 9일 중 반나절 정도의 귀한 시간을 저렴하고 작은 캐리어를 사기 위해 허비했다. 하지만 퀄리티가 좋으면 가격이 비싸고, 가격이 좋으면 만듦새가 엉성하다는 경제원리법칙만 몸소 깨치고 말았을 뿐. 가격에 타협해서 사면, 지구 반대편까지 가서 옆동네인 메이드인 차이나 제품을 사는 꼴이 되어버린다. 결국 쇼핑백을 양손 가득, 캐리어 손잡이에 걸고 이고 지고 돌아왔다. 여행 막판에 너무 지쳐서 뭐가 어땠는지 기억에 남은 게 없을 정도였다.



그다음에 남편과 함께 떠난 여행은, 회사에서 받은 월급도 있겠다, 나의 꿈(을 빙자한 예쁜 쓰레기)들을 잔뜩 사가지고 왔다. 결혼 전에 내 맘대로 방 꾸미기도 못했던 것이 신혼집 꾸미기라는 미명 아래 폭발한 것 같다. 와중에 간은 작아서 크고 좋고 비싼 건 못 사고 자잘 자잘한 것들만 사부작사부작 사 모았다. 옷과 화장품을 넣은 캐리어 하나, 빈 캐리어 하나 들고 가서 둘 다 터질 때까지 채워 오는 게 여행의 목표와도 같았다. <중요한 건 가방에 무엇이 들었는지가 아니라 네 마음에 무엇이 들었는지란다> 유럽 중세시대에 만들어졌다는 유서 깊은 거칠거칠한 돌바닥이 나에게 넌지시 메시지를 던졌지만, 나는 뻐근해진 손목만을 탓하였다.






이후로 아기가 태어나면서 잠깐 여행라이프는 보류. 당시 15평 투룸이었던 집에서 생존 육아를 하기 위해 물건 비우기를 실천했더랬다(아마 물건 많은 30평대 집 거실이나 우리 집 거실이나 비슷했을 것 같다). 여행지에서 사 온 자석이나 무거운 컵, 스노우볼이 아기를 공격할 흉기로 보이기 시작하니, 비우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저렴한 관광기념품들이니 중고거래가 될 리 만무했다.


그리고 드디어 깨달았다. 아! 돈 주고 사 왔는데 버릴 때도 돈이 드는구나! 여행지에서는 이거 안 사면 여행 온 보람이 없는 것과 같은 줄 알았는데. 여행지에서 사 온 자석이나 머그컵이 나를 행복하게 해 주는 게 아니었다. 심지어 여행지에서 봤을 때 빛이 났던 물건들도 우리 집으로 데려오니 그 맛이 나질 않았다. 오히려 바닷바람을 쐬며 낮잠을 잤던 기억, 노상 카페에 앉아서 마셨던 커피 한 잔, 길거리에서 베어 물고 감탄했던 소시지만 끼워 넣은 거친 빵이 마음속에 더 진하게 남아있었다. 진짜 중요한 건 물건에 있지 않았다. 그 물건들도 그 바람, 그 햇살, 그 여유 속에 진열되어 있기에 더 빛나 보였던 것이었다.




이후로 우리는 여행지에서 구경은 많이 하되 구입은 하지 않는 쪽으로 바뀌어갔다. 현지에서만 살 수 있다는 이국적인 소스도 사 와봤자 내 손맛으로는 여행 중에 느꼈던 그 맛이 절대 나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뒤로 소스류도 구입하지 않고 있다. 심지어 글로벌 시대가 되다 보니 유명하다 싶은 것들은 이마트, 홈플러스, 쿠팡 셋 중에 한 군데서는 꼭 파는 것 같다. 쇼핑해야 한다는 마음을 버리니 여행이 한층 여유로워졌음은 물론이다.



예쁜 기념품은 사진으로 찍어 블로그에 올리는 것으로 만족하고 현지에서 파는 간식 정도만 사 오다 보니, 아이가 둘인데도 불구하고 캐리어 하나에 모든 짐을 넣을 수 있게 되었다. 최근에는 건강을 위해 과자나 초콜릿 섭취도 확 줄였더니 간식 구입에도 목매지 않을 수 있게 되었다.





여행에서 쇼핑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내 인생 첫 해외여행지에서처럼, 카메라를 들지 않고 여행 다니는 것과 비슷하다. 남들 다 하는 것 따라 하겠다고 시간 쓰고 돈 쓰는 대신에, 이국적인 바람과 햇살을 나만의 방식으로 내 마음에 받아 적기 하는 것. 여행에서 현실로 돌아왔을 때를 미리 걱정하며 (어쩌면 대부분 메이드 인 차이나인) 플라스틱이나 도자기 조각에 나를 투영하지 말자. 평소와 낯선 환경에서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있는지 나의 내면의 소리에 귀 기울여보자. 그리고 그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다면, 그것보다 더 좋은 기념품은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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