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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품 지갑에 흔들리지 않는 방법

by 미니멀파슈하


그러니까, 그 사건은 내가 고3 때 교실에서 일어났다. 나의 인생을 뒤흔들 정도로 충격적이었던 '그 사건' 말이다.


군무원인 아빠, 작은 아파트의 경리였던 엄마. 우리집은 누가 봐도 그렇게 넉넉한 편은 아니었다. 따라서 우리집에서 소비 관련한 미덕은 오직 절약뿐이었다. 그래서인지 정기적인 용돈은 없었다. 용돈을 타려면 문제집이든 학용품이든 어떻게든 구실을 만들어서 만 원짜리를 받아내고, 그 거스름돈을 오랜 기간 동안 모아 예쁜 노트나 스티커 따위를 사는 게 내 경제생활이자 취미생활의 전부였다. 그래서 문구점에서 그 손바닥만 한 빠알간 지갑이 눈에 들어온 건 그렇다, 마치 <사고>와도 같았다.


눈을 감아도 생각이 난다는 건 딱 그 지갑을 두고 하는 말 아닐까? 아무리 봐도 이런 작은 동네 문구점에 있을 것이 아니었다. 지금 쓰고 있는 낡은 내 지갑을 열어 지폐수를 헤아려봤다. 너무 오래전 일이라 정확한 금액은 생각이 나지 않지만, 내가 가진 돈을 전부 써야 그 지갑을 내 가방에 담을 수 있었다(비싼 금액은 아니었지만 여유 용돈이 그만큼 없었다). 지갑을 사면, 지갑에 담을 돈이 없어지는 아이러니! 쉽사리 마음을 정하지 못하고 매일 문구점에 들러 그 지갑이 아직 안 팔리고 남아 있는지를 체크했다. 그리고 어느 날, 나는 결국 그 지갑을 결국 내 손에 넣었다. 고민은 충분히 했다고 생각한다.


손바닥만 한 반지갑은 살짝 와인빛이 감도는 빨간색의 반딱거리는 재질이었고, 그 위로 비슷한 색의 실로 다이아몬드 퀼팅모양이 새겨져 있다. 한 번, 두 번을 접고 나면 금장 하트장식이 마무리를 해 준다. 아무리 봐도 기가 멕히다. 참, 잘 샀다.

그러나 그 뿌듯하고 행복했던 마음은 지갑을 산 지 이틀째 저녁, 금장 장식이 부러지며 함께 부러지고 말았다. 지갑을 들고 크게 휘두른 것도 아니고 힘을 주어 여닫은 것도 아닌데 그렇게 쉽게 부러진 걸 보면, 걔는 그냥 그렇게 태어난 것이다. 하지만 몇 달 쓰다가 부러진 것도 아니고, 가방 속에서 이리저리 굴러다니다가 부러진 것도 아니고, 손터치 몇 번 만에 그렇게 며칠 만에 톡 부러질 일인가? "문구점에서 파는 게 그렇지 뭐." 내 모습이 너무 우울해 보였는지 아빠는 공구함에서 순간접착제를 찾아 부러진 하트 장식을 다시 붙여주셨다. 하지만 손재주 좋은 아빠가 아무리 손 봐도 갈라진 틈 사이로 본드가 삐죽 튀어나올 정도였으니, 원래 모습대로 감쪽같이 돌아가는 것은 영 실패였다. 하트장식에 크게 가 있는 금이, 참으로 내 심장에 난 것 같아 보였다. 아니 아무리 문구점에서 파는 거라지만 이런 내구성이 말이 되는가. 이 지갑을 찍어낸 기계는 장인정신이라곤 없는 것일까. 왜 하필 우리집 앞 문구점에서 이걸 발견해서 이 사단이 난 것인가.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정말... 속상했다.






하지만 며칠 뒤 교실에서 더 속상한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나는 그렇게 금이 가 버린 지갑이 부끄러워서 웬만하면 책가방 깊숙한 곳에 두고 잘 꺼내지 않았는데, 별로 친하지 않은 반 친구가 이번에 생일선물로 남자친구한테 지갑을 선물 받았다며 친구들에게 보여주는 걸 자랑하는 걸 우연히 본 것이다. 그런데 충격적이게도, 그 지갑 생김새가 내 지갑과 아주 똑-같이 생긴 것이다.


차이점이라곤 딱 색뿐이었다. 빨간색인 내 지갑에 비해 친구의 지갑은 은은하게 약한 펄이 살짝살짝 보이는 딸기우윳빛깔이었다. 표면이 차르르르 빛나는 것이 <우아함>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옮겨놓은 것 같았다. 여기에 비하면 내 지갑의 빨간색은, 그야말로 촌스러움 그 자체. 영롱한 핑크빛 위로는 아주 견고해 보이는, 낯이 익은 하트 장식이 올려져 있었다. 세상에.



이거 어디에서 샀대? 은근슬쩍 물어보니 친구가 근처 백화점을 알려주었다. 다른 친구가 듣더니 "맞아, 거기 ㅇㅇ매장이 있지!" 맞장구친다. 처음 듣는 브랜드다. 마음속으로 그 브랜드 이름을 20번 정도 되뇌다가, 집에 와서 컴퓨터로 검색해 보니 쇼핑 사이트가 떴다. 내 지갑의 딱 10배 정도 되는 가격이었다. 그러니까 내가 문구점에서 한눈에 반해 며칠 동안 전전긍긍하면서 구입한 그 지갑은, 유명한 브랜드의 가품 지갑이었던 것이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순간,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올랐다. 당시의 나는 도덕심과 정의감으로 똘똘 뭉친 고3, 표절과 불법복제를 진심으로 증오하고 멀리하는 학생이었는데. 불법 디자인 복제 한 싸구려(치고는 조금 가격이 있는)에 내 마음이 오르락내리락했다는 사실에 부끄럽고 부아가 치밀었다. 망신도 이런 망신이 있나. 나는 입을 꾹 다물고 금이 간 하트를 열어 몇 장 들어있지도 않는 지폐를 전부 빼냈다. 원래 쓰던 낡은 지갑을 다시 서랍에서 꺼냈고, 부러진 하트는 결국 쓰레기통으로 들어갔다.




다행스럽게도, 내 지갑의 비밀을 알아챈 친구는 아무도 없었다. 근데 그러면 뭐 해, 내가 안다. 너무 잘 안다. 당시 여드름투성이에 두꺼운 안경을 쓰고 작은 키에 헝클어진 반곱슬머리를 한 나는 남자친구가 있다는 그 친구도 부러웠고, 그 친구의 외모도 부러웠고, 자신감 있는 모습도 부러웠고, 그 핑크색 지갑도 부러웠다. 이후로 지갑을 교체할 때마다 그때의 불편한 기억이 불쑥불쑥 튀어나와 내 심장을 할퀴고 사라지곤 했다.


이 때의 기억 때문인지 나는 오랫동안 지갑을 구입하는 게 너무 무서웠다. 이 제품도 어느 것의 짝퉁인 건 아닐까 두려운 것인지, 그때 당시의 자신감 없고 여드름투성이인 나를 마주하는 게 달갑지 않은 것인지는 알 수는 없었으나 한 가지 확실한 건 '지갑'이 나에게 주는 의미가 이제 너무 불안하고 불편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삶에서 이 불안요소를 통째로 덜어내고자 했다. 그러니까, 웬만하면 지갑을 쓰지 않기로 한 것이다.


덕분에 나는 아직까지도 지갑 욕심이 없다. 거기에 어떤 로고가 달려있든 어떤 사회적 브랜드적 가치가 있든 신경 쓰지 않기로 한 뒤로 내 마음은 평화를 되찾았다. 부자되는 법을 알려주는 책에서 지갑은 어째야하고 잔소리를 아무리 해대도 내 뜻은 확고하다. 한동안은 손바닥보다 작은 지퍼 달린 파우치-친구가 여행지에서 사 와서 선물로 준 것이었다-에 지폐와 카드를 넣어 다녔다. 이후로는 리락쿠마가 그려진 귀여운 파우치를 꽤나 오랜 시간 동안 사용했다. 솔직히 고백하자면 명함케이스 같은 지갑도 몇 번 사 봤는데 결론은 삼성페이로 정착. 나로 말할 것 같으면 삼성페이 처음 나왔을 때 진심으로 환호성을 지른 사람이다. 대형마트에서 삼성페이가 되지 않았을 때부터 사용했으니.


이제는 카드 사용이 좀 어렵다는 재래시장이나 푸드트럭에서도, 핸드폰 몇 번만 톡톡 치면 계좌이체가 가능하다. 그야말로 IT만세다. 몇 달 전에 해외여행을 다녀왔는데 QR코드로 결제하는 곳도 꽤 많았다. 로밍만 한다면 삼성페이 결제도 가능했다. 눈부시게 발전한 기술 덕택에 나의 우울하고 슬펐던 과거는 이제 '에피소드' 취급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백화점 지갑코너에서 과거의 불쌍한 나를 위해 기웃거리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아도 된다. 첨단 기술사회의 뿌듯한 일원이 된 것 같아보이는 느낌은 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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