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색 볼펜 말고도 있었다
최근 성공한 사람들이 썼다는 여러 가지 자서전적 책을 읽을 기회가 있었다. 흥미롭게도 그들의 책에서 공통적으로 이야기했던 것들이 몇 가지 있었는데 '정리정돈'에 대한 관점이 거의 동일하다는 것이었다.
그들은 시간과 할 일을 정리 정돈하는 것을 최우선과제로 삼았으며, 그것을 위해 물건과 공간을 정리하는 것을 수단으로 삼았다. 살림과 미니멀라이프에 관심이 생겨서 물건과 공간을 정리정돈하다보니 시간과 할 일이 정리되는 것을 느껴보았던 나로서는, 나름 신선한 관점이었다.
성공을 향해 나아가기 위해서는 1분 1초도 허투루 쓸 수 없다(물론 휴식을 하지 않겠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일단 인생의 목표를 정한 뒤, 그것을 기준으로 중요한 일과 중요하지 않은 일을 나눈다. 그런 다음 한정된 24시간을 중요한 일부터 채우는 것이다. 마치 유리병 속에 굵은 자갈을 먼저 넣고 모래는 나중에 넣어야 꽉 채울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잡동사니와 생필품을 분류하는 것처럼, 주방에서 접시끼리 컵끼리 분류하는 것처럼 '해야 할 일'을 분류하는 작업이 먼저 필요했다.
꿈을 이루는 데에 필수불가결하고 시간을 길게 들여야 하는 것들은 굵은 자갈이 되었다. 자주 쓰는 접시들은 눈높이 찬장에 두어야 하는 것처럼 중요한 일들은 시간에서도 전진배치되어야 하는 법이다.
10평대의 작은 집에서 아이를 1년 반 정도 키우면서 나의 '미니멀력'은 그 어느 때보다도 강하고 단단해져 있었다. 작은 부엌의 상부장에는 선별된 물건만이 놓여있어야만 했다. 그래야 살림이 편했다.
추가로 선반을 구매해서 그곳을 빽빽이 채우는 선택지도 물론 있었지만, 매번 퇴근이 늦어서 육아와 살림에 도움을 줄 수 없는 남편과 차로 2시간 이상 거리에 있어 얼굴 한 번 보는 것이 어려운 부모님들 사이에서 아이를 키우려면 잠깐 한눈팔아도 문제 될 일 없는 환경조성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아이가 선반에서 물건을 잡아 내빼어 거실에 흩트려놓는다거나, 선반을 짚고 올라가는 위험한 일은 애초에 일어나지 않는 것이 좋다. 인터넷 배송도 제법 빠르고, 걸어서 5분 거리에 슈퍼마켓도 있었으니 서랍과 찬장을 당장 쓸 일 없는 물건들로 채워두고 관리하느라 애써 굳이 진을 뺄 필요는 없었다.
이렇게 공간에 필요한 물건과 필요하지 않은 물건을 분류하는 일을 끊임없이 하다 보니, 내 안에서 놀라운 변화가 일어났다. 어쩐지 어떤 업무를 맡아도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묘한 자신감이 생긴 것이다.
이런 자신감은 2년 동안 업무공백이 있던 나에게 큰 자산으로 다가왔다.
'사무실도 미니멀을 해 볼까?'
복직하며 생각만 했던 그 일을 실행에 옮겨보기로 했다.
가장 먼저 사무용품을 단순화했다. 필기구들은 전부 올인원 제품으로 두었다.
3색 볼펜과 샤프를 한 번에 쓸 수 있는 펜(제트스트림), 두 가지 색을 하나로 쓸 수 있는 형광펜(모리스), 지우개가 달린 수정테이프(다이소)를 두니 굳이 연필꽂이가 필요 없었다.
여유 공간이 한 뼘 늘어났다. 덕분에 갑자기 자료를 책상에 넓게 늘어놔야 할 때가 생기더라도 굳이 책상을 치우는 수고는 하지 않아도 되었다.
다음으로는 L자 파일을 하나 마련했다.
그 안에는 앞으로 당장 처리해야 할 서류들을 모아놓고, 파일의 겉면에는 업무를 할 때 필요한 정보들(예를 들면 업무용 계좌번호나 직원들이 공용으로 쓰는 사이트의 비밀번호 같은 것들)을 적어두었다. 나만의 업무 팁들도 이 파일의 겉면에 적어두었다. 완전히 체득한 팁들이나 완전히 끝난 업무 관련 메모는 뜯어내어 파기하였다.
이제 당장 어떤 일을 해야 하는지 체크해야 할 때나 업무 팁을 보기 위해선 L자 파일만 꺼내보면 되었다. 덕분에 두꺼운 업무수첩과 파일철들을 책상에서 치워낼 수 있었다.
업무 특성상 출근시간 내내 켜두어야 하는 컴퓨터의 세팅도 새로 바꾸었다.
제일 먼저 바탕화면을 싹 비워냈다. 해야 할 업무들만 바탕화면에 꺼내두었고 나머지는 전부 시작표시줄에 단축키로 등록했다. 작업 완료된 폴더와 책꽂이에 빽빽이 꽂혀있던 참고자료를 스캔해 둔 폴더도 단축키로 불러낼 수 있었다. ㅡ나중에 돌이켜보니, 종이로 보는 것보다 검색기능을 쓸 수 있는 모니터로 확인하는 것이 더 빠를 때가 많았다.
바탕화면의 나머지 부분은 달력 위젯을 띄워놓았다. 모니터를 보기만 해도 달력과 해야 할 일이 한눈에 들어왔다. 자료들로 가득 찬 책꽂이와 탁상달력은 이렇게 비워냈다.
하나의 업무지만 여러 파일을 써야 하는 것들은 엑셀의 스프레드시트 기능을 이용하여 하나의 파일로 합쳐놓았다.
예전에는 엑셀 파일, 파워포인트 파일, 워드프로세서 파일을 각각 열어가면서 작업을 해야 했는데, 엑셀 파일 하나로 합치고 난 뒤에는 1번 시트에 필요한 정보만 입력하면 나머지는 자동적으로 처리할 수 있게 한 것이다. 자료입력 표 옆에는 해당 업무 관련 사규나 팁, 관련업체 전화번호 정보들을 함께 적어두었다. 이 파일 자체로 업무용 자료이면서, 매뉴얼이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직원면접을 진행해야 한다면, 1번 시트에 응시생과 면접관의 정보를 입력한다. 그러면 2번 시트에는 응시번호 명찰이 인쇄되고, 명찰을 만들 때 주의해야 할 사항이 함께 적혀있다. 3번 시트에서는 면접관이 사용할 실기채점표가 만들어지며 그 옆으로 관련 사규 등을 볼 수 있는 링크도 함께 걸려있다. 면접관용 서약서, 자리배치도 등등 기존에는 족히 3시간도 걸릴 일이었지만 이 작업을 하고 나니 30여분 정도로 업무시간이 훅 줄어들었다. 필요한 것들이 순서대로 시트별로 정리되어 있으니 누락된 자료 없이 전부 출력하는 것도 가능했다.
가끔 한 번에 여러 개의 작업을 하는 것은 비효율적이거나 성과가 좋지 않다고 여기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수많은 자기 계발서 저자가 말했듯, 나에게 크게 중요하지 않거나 시간만 잡아먹는 것들을 '하나로 묶어두는 것'은 시간을 절약하는 데에 꽤 도움을 준다.
여러 펜을 고를 필요 없이 4색 볼펜 하나만 잡으면 된다.
업무수첩과 포스트잇을 뒤적거릴 필요 없이 L자 파일만 꺼내 들면 된다.
자료가 어디 있는지 뒤적일 필요 없이 컴퓨터의 검색 기능을 활용한다.
해를 넘길 때마다 기존의 업무수첩과 탁상달력을 정리하고 새로운 것을 마련하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다.
엑셀스프레스시트의 기능을 백분 활용하면 클릭 한 번으로 필요한 회의자료를 모두 만들어낼 수도 있다.
그래서 사무실에서의 올인원이란, 제법 유능한 개인 비서를 두는 것과도 같다고도 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