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 등단 일주일 차, 맷돌에 기름칠 좀 하려고 태블릿피씨까지 들고 도서관에 출근했는데 한참 동안 까만 모니터와 눈씨름하고 있는 걸 10분이 지나서야 발견했다.
천고마비의 계절엔 역시 독서가 최고라지만 그래도 독서의 완성은 글쓰기라던데. 그럼 이번 가을엔 나도 글 한번 제대로 쓴다는 열정으로 멋지게 일필휘지 해볼까 싶어 도서관까지 찾아왔거늘. 아직 폭염주간이라 그런 것일까. 따끈한 커피에 설탕을 스르륵 녹여 쭉 들이키면 글이 좀 써질 텐데, 아이스아메리카노가 어울리는 계절이라 글이 잘 안 써지는 것임에 틀림없다. 잔념들이 얼음처럼 머릿속을 둥둥 떠다니며 딸가닥거리는 것이 아이스아메리카노의 모습을 아주 그냥 쏙 빼다 닮을 때부터 알아봤다.
그래, 그랬구만. 역시 날씨 고 놈이 문제였다.
글쓰기를 포기하고 글쓰기에 대한 책을 펼쳤다. 아메리카노에 치즈케이크가 어울리는 것처럼, 더운 날씨엔 역시 독서가 어울린다. 글쓰기보단. 그럼에도 불구하고 미련의 끈은 놓지 못한 채 글쓰기에 대한 책을 집어 들어보았다.
책에서는 다양한 글쓰기 기법을 소개하고 있는데, '만약에'를 가정해 보고 글을 쓰는 방법도 있다고 했다. 만약에ㅡ라. 이런 건 MBTI에서 두 번째 글자가 N인 사람에게 아주 유리한 게임이다.
일단, 치즈케이크가 필요하다.
만약에
숨이 너무 차올랐다.
그냥 가만-히 방 안에 앉아있을 뿐이었는데 막 숨이 가빠오더니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 앉아있는데도 주저앉아야 할 것 같은 느낌이었다. 갑자기 예전에 티브이에서 공황장애를 앓았다는 연예인이 이런 증상을 얘기했던 게 생각나서 급하게 네이버를 켜보았다. 어머나어마나, 역시나 맞았어. 이놈의 육아가 스트레스를 불러온 게 틀림없었다. 나는 고민 끝에 핸드폰을 들고 거침없이 번호를 눌렀다. 또르르릉- 또르르릉- 신호음이 다섯 번이 채 되기도 전에 "어" 소리가 들렸다.
"어, 엄마, 나야. ...바빠요?"
"아니야, 얘기해."
엄마의 '얘기해' 소리에 나는 속사포 같은 랩을 쏟아냈다.
"아니, 엄마, 그 나 육아수당 받아야 하는 거 있잖아. 그거 센터에서 전화가 왔는데 나 서류가 하나 부족하다고 꼭 오늘까지 와서 내달라고 그러네? 혹시 나 나갔다 오는 동안 잠깐 애 좀 봐줄 수 있어요?"
거짓말이다. 요즘은 전산으로 다 되는 세상이다. 하지만 나 너무 힘들어서 애 떼놓고 바람 좀 쐬고 싶다는 소리는 차마 양심에 걸려서 못 하겠다.
"어휴 그럼, 알았어. 잠깐만 기다려 봐. 줌바댄스 회장님한테 오늘 못 간다고 연락하고 바로 출발할게."
인터넷은 고사하고 육아휴직이란 단어조차 없던 시절에 나를 낳아 키웠던 엄마는 의심 한 톨도 없이 바로 오겠다고 했다. 한 30분쯤 지났을까, 삐삐삐삐 현관문 여는 소리가 들렸다.
"애기는 어딨어."
역시 인사 따위는 필요 없는 우리 사이.
"아빠는?"
우리는 서로 할 말만 한다.
"너네 아빠 오늘 친구들이랑 테니스 치고 저어기 문탁이 삼촌네 가 가지고 한 잔 하신다더라."
"엥 그래? 그럼 엄마 오늘 나랑 같이 저녁 먹어. 우리도 맛있는 거 시켜 먹자."
"아휴 뭐 아깝게 시켜 먹어. 전에 생닭 사놨던 거 그냥 있지? 백숙해 줄게."
그렇게 말하는 엄마의 눈길은 이미 아기한테 고정이 되어있었다. 아이도 오래간만에 본 할머니 얼굴이 낯설지는 않은지 울지 않는다. 좋았어, 계획대로!
"아 맞다 엄마, 그리고 나 잠깐 희연이 만나서 커피 한 잔 하기로 했어. 그 왜 알지? 배냇저고리 잔뜩 물려줬다는. 마침 남편이 휴가 중이라서 애기 봐준다고, 잠깐 얼굴 볼 수 있다네?"
신발을 신으며 사전에 통보되지 않는 사항을 마구 쏟아놓는데도 엄마는 이쪽을 쳐다보지도 않는다. 할머니는 벌써 손주 손을 잡고 "오이구! 오이구!" 하느라 정신이 없다. 아이구 그렇게 좋으실까. 하긴, 나한테는 짜증만 부리는 아기도 희한하게 할머니는 참 좋아한단 말이야.
"알았어, 저녁 먹기 전에만 와."
"그럼 부탁해요~"
물론 희연이 만난다는 것도 다 거짓말이다. 눈 마주치면 거짓말 들킬까 봐 조마조마했는데, 엄마는 아기한테 눈이 고정되어 있느라 내 동공이 떨리는 순간을 포착해내지 못했다. 현관문이 꽝 닫기는 소리에 집 안에서 '우에엥~'소리가 난 것 같은데. 환청이겠지?
아기띠도 없이 유모차도 없이 온전히 가을바람을 느낄 수 있다니. 나는 바깥으로 나오자마자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자유다! 소리치고 방방 뛰고 싶었지만 마음을 꾹 눌러 담고 핸드폰으로 지도 어플을 켰다. 아이가 낮잠 잘 때마다 짬짬이 눈도장 찍어놨던 브런치 집이 몇 군데 있었는데, 이 중 하나는 오늘 꼭 가야겠다, 무슨 일과 어떤 일이 동시에 일어난다고 하더라도*.(*대사출처:드래곤라자).
아이가 태어난 뒤로 나는 고독을 사랑하게 되었다.
혼자서는 밥도 커피도 못 먹는 존재인 줄 알았던 내가, 이렇게 혼자만의 시간을 사랑하고 있다. 커다란 4인용 테이블에 혼자 앉아서 핫케이크를 써는 내 자신이 이렇게 가엾고 기특할 일인지 아이를 낳고 나서야 깨달았다.
혼자의 시간을 사랑하게 되었지만 그래도 역시 브런치 A세트는 혼자 먹기엔 양이 너무 많아 반절 정도는 남기고 말았다. 포장해 갈까 하다가 행여 거짓말이 들통날까 봐 그냥 포기하기로 했다. 계산을 하고 나오려는데, 진열대 옆 치즈케이크 위로 엄마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저번에 미숙언니가 치즈케이크 먹어봤는데 그게 그렇게 맛있다대? 그 언니도 치즈는 싫어하더만, 치즈케이크랑 치즈랑 뭐가 다른 거야?'
가만, 백숙 먹고 치즈케이크 먹는 건 페어링이 안 맞지 않나? 그래도 뭐 어때. 조각 케이크 하나까지 포장해서 브런치집을 나섰다.
혼자 나가서 한 4시간쯤 쉬다가 들어가야겠다, 했던 다짐은 동네 작은 놀이터 앞에서 무너지고 말았다. 아이들 어린이집 끝날 시간인 건지 엄마 손 또는 할머니 손 잡은 아기들이 길거리로 쏟아져 나오는데, 그중 놀이터에서 더 놀겠다며 징징거리며 우는 아이를 달래는 할머니의 모습이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차마 아기에게 혼내는 말은 못 하고 "어여 들어가야지"소리만 반복하고 있는 모습을 보니, 혼자서 아기를 보고 있을 엄마 생각이 났다. 손에 들려있는 치즈케이크 상자가 갑자기 더 묵직해졌다.
그래, 그냥 집으로 가자.
'덕분에 서류 잘 내고 왔어' 거짓말 딱 한 번만 더 하고 케이크는 백숙 먹기 전에 커피 내려서 엄마랑 수다 떨며 먹지, 뭐.
엄마랑 이야기하면 금세 배가 꺼지니까, 밥 먹기 전에 케이크 한 조각 나눠 먹는다고 큰 일 생기지 않는다. 무엇보다 이제 밥 먹기 전에 간식 먹는 것 정도로 잔소리 들을 나이는 지났다. 나도 이제 애 엄마라니까?
그러니까, 이게 내 '만약에' 다.
육아하다가 숨이 가빠와서 주저앉은 채로 주저앉았다는 첫 번째 문단 이후로는 전부 거짓말이다. 우리 엄마는 내 아이의 얼굴을 본 적이 없다. 그래도 남편은 남친시절 엄마의 장례식장에 왔었으니, 아마 남편 얼굴은 알고 있지 않을까 싶지만.
아기가 하루종일 이유도 없이 대성통곡하다 지쳐 쓰러져 잠든 밤, 남들은 이 터널을 어떻게 지나온건가 인터넷에 검색해 보던 밤, "친정은 사랑"이라든가 "친정엄마 없었으면 어쩔 뻔했냐"는 글에 유난히 더 가슴이 미어지던 날이었다. 또 누군가는 운동이 답이라고 했다. 그런데 홈트를 하면 자세가 망가질 수 있으니 꼭 전문가에게 PT를 받는 게 좋다고 했다. 고개를 들어 시계를 보니 밤 11시. 남편은 아직도 퇴근 전이고 친정아빠가 홀로 사는 곳은 여기서부터 운전해서 두 시간을 달려가야 한다.
책에서 던져 준 '만약에'라는 단어 덕분에, 그래도 친정엄마랑 같이 아기를 보면 이렇지 않을까 상상이나마 해봤다. 그런데 엄마는 치즈케이크를 먹고 뭐라고 평을 했을까? "치즈케이크랑 치즈랑 뭐가 다른 거야?" 엄마는 질문만 던지고 입원한 병원에서 퇴원하지 못했다. 이 문제에 대한 가상의 답이 도저히 떠오르질 않는다. 엄마는 치즈의 느끼한 맛을 싫어했지만, 다들 알지 않는가. 치즈랑 치즈케이크는 조금... 다른 차원의 맛인걸.
'어머 이거 진짜 치즈랑 다르네. 부드럽고 고소한 게 블랙커피랑 마시니까 완전 딱이야, 딱.'
'아휴 이거 느끼하기만 하구만, 다들 이걸 뭔 맛으로 먹는대? 담부터 사 오지 마 돈 아깝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