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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계연춘추 Dec 22. 2021

1.9 “행운섬”과 스트랫포 출신 지정학자들(상)

“이것을 받아 삼켜 버려라. 이것이 네 입에는 꿀같이 달겠지만, 네 배에 들어가면 배를 아프게 할 것이다(《요한의 묵시록》 10장 9절).”


미국 트럼프 행정부의 외교적 실책, 그리고 이어진 아프가니스탄 패배를 연구하다 보면 우리는 스트랫포 출신 지정학자들의 그림자를 발견하게 된다. 프리드먼과 카플란, 그리고 자이한으로 이어지는 이 계보의 지정학자들의 담론 속에서 미국은 점점 병들어갔고, 세계 질서에 대한 이성적인 판단력을 상실했다. 무엇보다 자이한으로 대표되는 비-개입주의 노선은 스파이크먼이 구상하고 브레진스키가 완성한 미국 중심 세계질서의 이론적 근간을 흔들어버렸다. 미국은 왜 자신들의 패권을 유지 수단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수단이던 지정학 지배체계支配體系를 스스로 해체했을까? 훗날 사가들은 이 문제를 놓고 고민하겠지만, 여기서 필자는 스트랫포 출신 지정학자들의 역할에 대해 말하고 싶다.

 스트랫포는 미국의 여러 싱크탱크 가운데 지정학을 이론적 근거로 세계정세를 판단하는 곳이다. 당연 나치 독일 이후, 지정학은 오랜 세월 정치지리학이나 역사지리학의 범주에서 다루어졌을 뿐, 현실 정치 문제를 해결하는 정치적 수단으로써 사용되지는 않았다. 그러나 미국의 국가안보보좌관 브레진스키는 국제관계 학자들에 의해 휴지통에 버려진 지정학을 국제정치에 접목시켰을 뿐만 아니라, 대소對蘇 지정학 전략을 수립해 중국적으로 소련의 팽창을 막고, 러시아 제국 이래 유지되던 조직화된 심장지대 제국을 붕괴시킴으로써 대륙 문명에 대한 해양 문명의 승리를 선언했다.


크렘린 궁전에 나부끼던 소련 깃발이 내려간 직후, 브레진스키는 미국이 세계 패권을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을 제시했다. 이를 정리하자면 ①유라시아 대륙 동부가 하나의 정치세력에게 통합되는 것을 막고(중국), ②유라시아 북부가 반미적인 세력에게 점령당하는 것을 막으며(러시아), ③유럽 대륙에 대한 영향력을 꾸준히 유지할 뿐만 아니라, ④러시아의 중동 지역으로 남하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그러나 완벽해 보이는 브레진스키의 이론에는 한 가지 결점이 존재하는데, 이는 다름 아닌 ① “세계섬” 개입에 들어가는 비용 문제와 ②이 같은 개입 작전에 들어가는 천문학적 비용에 대한 미국 중산층의 불만이다. 2008년 리먼브라더스 사태로 촉발된 미국 발 금융위기로 인해 미국 중산층은 몰락하기 시작했으며, 직장을 잃은 사람들은 트럭 운전사 또는 비정규직으로 전락하여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삶을 살아가야 했다. 이런 미국 중산층들이 보기에 자신들이 낸 세금으로 테러와의 전쟁을 벌이는 것은 너무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왜 우리가 낸 세금으로 다른 나라에서 전쟁을 일으켜야 하는가? 이 돈이 우리의 삶을 개선하는 데 사용될 수는 없는 일인가? 이 같은 질문이 꼬리를 물면서 이들은 점차 워싱턴의 개입주의 노선에 불만을 품게 됐으며, 자신들의 이 같은 불만을 당위성 있는 이론 체계로 확립해 줄 수 있는 전략가를 찾기에 이르렀다.


오랜 시간 먼로주의와 청교도清教徒적 선민사상의 영향을 받은 미국은 북아메리카 대륙에 위치한 자신들의 지정학적 우세를 과신하는 풍조가 일찍이 있었다. 지리학자 조지 크레시는 심장지대의 전략적 가치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며, 설사 아시아에 새로운 중심지 역할을 할 수 있는 지역이 등장한다 할지라도, 세계 패권의 열쇠는 결국 미국이 쥐고 있다고 봤다. 그에게 있어 미국이야말로 심장지대이자 지정학적 성채이며, 워싱턴의 도움 없이는 어떤 세력도 세계대전에서 승리할 수 없을 것이라고 호언장담했다. 미국의 지정학자 엘런 헨릭슨 또한 태평양과 대서양이라는 거대한 바다의 보호를 받는 아메리카 대륙을 가리켜 “행운섬”이라 이름하며,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인 소련에 비해 본토 안전 보장이 가능한 지리적 조건을 강조했다.


실제로 미소 양국이 INF 협상에 들어갈 당시, 모스크바는 워싱턴에게 모스크바를 위협할 수 있는 중거리 탄도미사일의 철수를 요구했다. 레이건 정부와 고르바초프 정부 간에 협의된 이 협정에 따라 미소 양국은 사거리 500~5500km인 중거리 탄도미사일과 순항미사일 등을 폐기했다. 이 조약에서 투발수단 사거리를 500~5500 km으로 설정한 까닭은 ①사거리 500km 이하인 미사일이 모스크바를 타격할 수 없고, ②5500km일 경우, 서독, 일본, 한국, 파키스탄, 사우디 아라비아 등 심장지대 주변부에 위치한 미국 동맹국의 미사일 기지에서 발사한들 소련 중심부를 위협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처럼 냉전 시대 군사협정조차 미국이 모스크바를 위협하는 핵무기를 얼마나 철수할 것인지에 대해 초점이 맞춰져 있을 뿐, 그 누구도 워싱턴과 미 본토의 안전을 묻지 않았다. 일단 (알래스카와 하와이를 제외한) 소련으로부터 너무 멀리 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태평양과 대서양이라는 천혜의 장벽의 보호를 받다 보니, 애초에 미국을 압도하는 해군 전력을 가진 것이 아닌 이상, ICBM 외에는 달리 공격할 방법이 없다. 이는 미국이 가진 가장 큰 지정학 자산이자, 냉전 시대 소련과의 이데올로기 전쟁에서 이길 수 있던 지리적 요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같은 “행운섬”에 대한 믿음은 한 가지 대전제가 있다. 바로 유라시아 대륙을 통합한 하나의 거대한 정치 동맹체가 출현하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프리마코프 이래 모스크바의 대중, 대이란 외교정책이 종국적으로 베이징-모스크바-테헤란 동맹을 불러올 것을 염려한 브레진스키는 모스크바와 베이징의 외교적 시도를 비웃으면서도, 이들이 결코 동맹을 결성하지 못하게 막아야 한다고 조언한 바 있다. 실제로 남중국해와 센카쿠 열도, 타이완 등지에서 일어나는 무력시위로 인해 워싱턴과 베이징의 관계가 불편해질 때마다 키신저와 브레진스키 같은 이들은 베이징이 모스크바와 가까워질 때 발생할 수 있는 지정학적 재앙을 경고하며, 베이징 지도부를 달래야 한다고 백악관 관계자들을 설득했다. 그들이 보기에 베이징에게 경제적 이익을 주어, 이들이 모스크바와 반-패권주의 동맹 결성을 막는 것만이 유라시아 대륙에서 미국의 지정학적 패권을 영속하는 길이라 봤다. 이 때문에 브레진스키와 같은 이들은 중국이 아시아에서 일정한 정치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묵인하고, 대신 중국이 서태평양으로 진출할 수 있는 지정학적 교두보 거점(필리핀, 한국, 일본)에 여러 군사기지를 두어 중국 해군의 서태평양 진출을 사전에 차단할 것을 주문했다.


미국의 이 같은 지정학적 요구를 읽은 베이징 저도부는 무리한 해상 진출보다는 중앙아시아와 인도양 진출을 통해 자신들의 국가 안전을 보장받고자 했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베이징 당국의 이 같은 중앙아시아 진출이 워싱턴의 묵인 내지는 지지 하에 진행됐다는 점이다. 브레진스키를 위시한 미국의 지정학자들이 보기에 베이징 지도부가 추진하는 이 신-실크로드 계획은 소련의 대 중앙아시아 영향력을 약화시킬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장기적으로는 미국-중국-일본 3개국의 경제 협력을 강화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내다봤다. 이 때문에 안디잔 사태 이전까지 워싱턴은 베이징의 중앙아시아 진출을 묵인했을 뿐만 아니라, 엑슨모빌과 같은 글로벌 에너지 회사들의 “범-아시아 대륙간 원유 가스 교량(Asia oil and gas continental bridge)” 구상을 지지했다.


하지만 굳건해 보이던 미·중 관계도 세르비아 중국 대사관 폭격(1999)과 하이난 정찰기 사건(2001)으로 미·중 관계는 조금씩 파열음이 생기기 시작했다. 미국과 첨예한 대립을 겪고 있던 베이징은 모스크바와 중앙아시아 5개국과의 영토 분쟁에서 한 발짝 물러나는 대신 이들의 지지를 요구했고, 예전부터 베이징을 반-패권주의 동맹(반미 동맹)으로 끌어들이고 싶어 했던 크렘린궁은 중국의 참여를 두 팔 벌려 환영했다. 이 같은 베이징과 모스크바의 위험한 관계는 상하이협력기구라는 다자주의에 입각한 반-패권주의 정치·군사 협력체로 발전하기에 이른다.


이 같은 상황 속에서 백악관은 점점 이성적인 판단 능력을 상실하고, 존 볼턴과 같은 네오콘의 주장에 따라 자국의 군사적 역량을 과신하는 상황에 이른다. 그러나 부시 정부 당시만 하더라도 브레진스키, 키신저 모두 건재했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에서 새로이 태동하는 신-유라시아주의, 그리고 중국의 지정학적 가치에 대해 잘 알고 있었던 이들은 백악관이 자신들이 만든 세계 지배체제의 근간을 흔드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나 베이징은 미국의 이 같은 호의를 점차 특권으로 생각하기에 이르렀으며, 자신들의 경제력을 과신한 나머지 자신들의 정치적 요구를 미국이 끝내 들어줄 것이라는 오판을 저지르기에 이른다. 중국은 점차 미국이 설정한 경계선을 넘어 남중국해와 센카쿠 열도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기에 이르렀으며, 마침내 센카쿠 열도와 스카보러 암초 영유권을 두고 일본, 필리핀과 다툼으로써 워싱턴이 설정한 레드 라인을 완전히 넘어서고 말았다. 하지만 중국은 워싱턴의 기조 변화를 읽지 못하고, 냉전 시대와 같이 워싱턴이 결국 자신들에게 양보하리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았다. 무엇보다 미국 GDP의 6할 가까이 되는 중국의 경제 규모는 이 같은 베이징의 오판을 굳히는 도구로 사용되었다.


베이징은 센카쿠 열도 사태 이후, 미국의 동맹국들에게 경제제재를 가하는 것이 생각보다 강력한 정치적 효과를 불러올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게 됐으며, 필리핀과 한국에 대해서도 똑같은 방법을 사용해 자신들이 원하는 정치적 목표에 달성하려 했다. 그러나 베이징은 자신들과 워싱턴의 관계를 너무도 과신한 나머지 미국의 대 아시아 정보 가운데 상당수가 일본과 한국, 필리핀 등 동맹국이 공유한 정보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말았다. 베이징의 공격적인 언행은 시시각각 미국 정계에 전해졌으며, 이는 베이징에 대한 워싱턴의 불신 내지는 혐오 불러오기에 충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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