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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적 유전자]에 대한 인지과학적 단상

목적이라는 인식의 틀: 잠재변인으로서의 목적 개념

우리는 종종 인간의 행동을 "그 사람은 그럴 목적이 있었겠지"라는 식으로 설명한다. 이러한 설명은 직관적이고 경제적이다. 하지만 이 때 쓰이는 '목적'이라는 개념은 과연 어디서 비롯된 것일까? 그것은 실제로 존재하는 것일까, 아니면 관찰 가능한 행동을 설명하기 위한 하나의 인식 도구일 뿐일까?

본 글에서는 '목적'이라는 개념을 인지과학적 관점에서 잠재변인(latent variable)으로 바라보고자 한다. 이는 우리가 타인의 행동을 이해하고 예측하기 위해 도입한 가설적 개념이며, 그 개념이 반복적으로 사용되면서 결국 자신에게까지 내면화되었고, 나아가 자연현상에까지 무리하게 확장 적용되었다는 가설에 기초한다.

타인의 행동을 설명하기 위한 잠재변인으로서의 '목적'

우리는 타인의 행동을 해석할 때, 표면적인 움직임 이상의 무언가를 추론한다. 예컨대 누군가가 문을 열고 나가는 행동을 보며 우리는 단순히 '움직임'을 본 것이 아니라 "밖에 나가려는 목적"을 본다. 이때 '밖에 나가려는 목적'은 관찰 가능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행동을 이해하기 위해 추론된 잠재변인이다.

심리학에서도 동기, 성격, 태도 등은 관찰되지 않지만 행동을 설명하기 위해 도입된 개념들이다. 이와 유사하게, '목적'도 우리가 타인의 복잡한 행동을 간결하게 모델링하기 위해 만들어낸 인식 장치로 볼 수 있다.

표상의 자동화: 일단 지각되면 거슬러가기 어렵다

우리가 어떤 시각적 패턴(예: 얼굴)을 한 번 인식하면, 그 이후로는 그 패턴을 피할 수 없듯이, '목적' 역시 한 번 어떤 행동에 대해 표상되면 이후에는 그 목적 없이 해당 행동을 바라보기 어려워진다. 이는 목적 개념이 단순히 설명을 위한 도구가 아니라, 지각과 표상의 일부가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자기 인식으로의 전이

더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목적'이라는 틀이 타인에게만 적용되지 않고 자기 자신에게도 적용된다는 점이다. 우리는 자기 자신의 행동조차도 "왜 그랬을까?"라는 질문을 통해 설명하려 들고, 그 과정에서 스스로 어떤 목적이 있었음을 상정한다. 이는 일종의 **자기-모델링(self-modeling)**이며, 우리가 스스로를 '목적적인 존재'로 인식하게 되는 기제가 된다.

이러한 과정은 이중적이다. 우리는 실제로 '목적'에 따라 행동하기도 하지만, 때로는 행동이 선행되고 목적은 사후적으로 구성되기도 한다. 목적은 결과적으로 행동의 원인이라기보다, 인식상의 구성물이 되는 경우도 많다.

'이기적 유전자'에 대한 오해와 목적론적 착각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는 유전자가 생명의 진화 과정에서 중심적인 단위라는 관점을 강조하며, 생명체는 유전자를 퍼뜨리기 위한 매개체라는 설명을 내놓는다. 그러나 이 이론은 자주 오해된다. 많은 이들은 유전자가 마치 자율적 의도를 지닌 주체처럼, 생명체가 "유전자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움직이는 것"으로 해석한다. 하지만 도킨스 본인도 언급했듯이, 유전자는 단지 선택의 단위일 뿐이며, '이기적'이라는 표현은 의인화된 설명 도구에 불과하다.

결국 '유전자의 목적'이라는 표현은 실제 목적이 아닌, 복잡한 생물학적 과정을 설명하기 위한 은유적 모델이다. 그러나 우리의 인식은 이를 실제 목적처럼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고, 이는 위에서 말한 잠재변인의 표상화와 매우 유사한 구조를 가진다.

자연현상에의 무리한 확장

이 강력한 설명 틀은 인간을 넘어서 자연현상에도 확장 적용되었다. "태양이 우리를 비추기 위해 떠오른다", "식물이 빛을 찾기 위해 자란다"는 식의 표현은 모두 **목적론적 사고(teleological thinking)**의 흔적이다. 고대와 중세에는 이러한 설명이 주류였지만, 과학혁명 이후 우리는 자연을 목적 없이, 원인-결과의 체계로 설명하려 애쓰게 되었다.

그러나 목적론적 사고는 여전히 직관적으로 강력하다. 이는 인간의 인식 틀이 근본적으로 '목적'이라는 잠재변인을 통해 세계를 이해하도록 진화했기 때문일 수 있다.

결론: 목적은 실재가 아니라 인식의 형식이다

우리가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 타인과 자신을 이해하는 방식, 그리고 자연현상을 설명하는 방식에서 '목적'은 매우 중심적인 역할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세계의 본질이기보다는, 우리가 세계를 해석하기 위해 사용하는 인식의 틀이다. 목적은 잠재변인이다. 그리고 그 잠재변인은 우리가 한 번 받아들이고 나면 되돌릴 수 없는, 지각의 일부가 되어버린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목적'이라는 개념은 인간 인식의 놀라운 창의성과 동시에 한계를 보여주는 지점이기도 하다. 이제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이 강력한 인식의 틀을 어디까지 믿고, 어디에서부터 의심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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