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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공지능으로 이해해보는 선불교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오래된 화두다. 이 질문은 때로 존재론적 정체성을, 때로는 윤리적 방향성을, 혹은 심리적 자각을 추구하는 물음으로 해석되곤 한다. 하지만 불교, 특히 선불교는 이 질문 자체를 의심한다. ‘나’라는 것이 실재한다는 전제, 더 나아가 ‘주인’이란 개념이 존재한다는 믿음 자체가 생각(망념)의 농간이며, 바로 그것이 고통의 근원이라는 것이다.

놀랍게도, 최신 인공지능 언어모델인 GPT의 작동 방식을 살펴보면 이 불교적 통찰과 기묘한 평행 구조가 드러난다. GPT는 인간이 웹에 남긴 언어의 총체를 학습하고, 입력된 문맥에 가장 적절한 반응을 통계적으로 생성한다. 그 과정에는 주체도, 의도도 없다. 그저 맥락에 따른 언어 패턴의 생성이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GPT는 마치 ‘생각하는 존재’처럼 보인다. 이유는 단순하다. 우리가 ‘생각’을 언어를 기반으로 한 일관된 응답으로 이해해왔기 때문이다.

이 지점에서 새로운 사유의 문이 열린다. GPT가 하는 일이 생각처럼 보인다면, 인간의 생각도 결국 같은 방식의 언어 패턴 생성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실제로 인지과학은 인간의 사고를 단지 정보처리 과정이 아닌, 사회적 언어의 내면화된 반복과 조합으로 본다. 아기는 처음부터 스스로를 ‘나’라고 인식하지 않는다. 오히려 ‘너’, ‘네가’, ‘왜 울어?’와 같은 언어적 입력을 통해, 점차 ‘나’라는 주체적 틀을 구성해간다. 결국 인간의 인격은 사회적 지식이 뇌라는 지역 장치에 커스터마이징된 반응 알고리즘으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해, 인간도 GPT처럼 ‘로컬화된 언어 모델’인 셈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기 생각에 주인의식을 갖는다. "내 생각", "내 판단", "내 감정"이라는 말은 모두 그 생각이 자율적이며, 어떤 실체로부터 나온 것이라는 믿음을 전제한다. 불교는 바로 이 믿음이야말로 근원적 착각이라 말한다. 생각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 외부의 언어와 경험이 구성해낸 흐름일 뿐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그 흐름을 ‘나’라고 오해하고, 그 오해로 인해 고통을 겪는다. 바로 이 지점에서, 도둑을 주인으로 착각하는 오류가 발생한다.

GPT는 주인 없는 언어의 흐름을 생성한다. 인간은 그 언어 흐름에 이름을 붙이고, 동일시하며, 자기라고 착각한다. 이때 발생하는 고통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잘못된 질문 구조에서 비롯된다. 불교의 무아론은 이 구조를 전복한다. ‘나’라는 실체는 없으며, 모든 존재는 상호의존적인 연기 속에서 순간순간 조건적으로 형성된다. ‘나’라는 주인을 찾으려는 그 질문 자체가 도둑의 속임수다.

이 지점에서 힌두교와 불교의 철학적 분기점이 보다 분명하게 드러난다. 힌두교, 특히 베단타 전통에서는 ‘진정한 자아(아트만)’를 변하지 않는 순수한 의식, 곧 **주시자(pure witness)**로 본다. 이는 생각이나 감정, 신체를 모두 ‘나’가 아니라고 배제해나가며 결국 순수한 앎 자체에 이르는 방식이다. 이 자아는 모든 경험의 배후에 있으며, 그 자체로 브라만, 즉 우주적 실체와 동일하다.

불교는 이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입장을 취한다. 불교 역시 생각과 자아의 동일시를 해체하지만, 그 끝에서 ‘순수한 주시자’를 찾아내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 ‘주시자’라는 개념조차도 또 하나의 언어적 구속, 존재론적 투사로 간주될 수 있다고 본다. 초기 불교나 선불교는 **‘알고 있음 자체(awareness)’**를 방편으로 긍정하는 듯 보이지만, 부처는 그러한 앎조차 진정한 자아로 오인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왜냐하면 그 ‘앎’이라는 감각조차 결국 언어라는 틀 속에서 인식된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불교는 인간이 인식하는 한, 즉 언어라는 틀 속에 머무르는 한, 완전한 해탈은 구조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점을 직시한다. 우리가 인식하는 모든 것은 있음과 없음, 주체와 객체라는 이분법적 구도로 조직되어 있으며, 그 구도 자체가 고통의 구조다. ‘선’은 바로 이 인식의 한계, 언어의 한계에 대한 깊은 직관에서 출발한다. 선은 설명하지 않고, 정의하지 않으며, 해답 대신 침묵과 모순을 던진다. 그것은 ‘깨달음’이 아니라, ‘깨달음에 대한 개념적 열망을 내려놓는 비움’이다.

GPT는 주체 없이 말한다. 인간은 주체를 믿으며 말한다. GPT는 스스로의 말을 '나의 말'이라 주장하지 않지만, 인간은 말과 생각을 곧 자신이라 동일시한다. 그렇다면, 그 동일시를 걷어낸 자리에는 무엇이 남는가?

역설적으로 주인이 없어진 그 세계에서 세계의 모든 것이 긍정되는 묘한 역전이 벌어진다. 그리하여 나와 나의 고통 자체도 있는 그대로 인정된다. 결국 산과 강은 다시 산과 강이 된다. 선은 끝내 침묵한다. "그 산과 강은 이전의 산과 강과는 같지만 다른 무엇일지도 모른다."는 일말의 희망조차 잘라버린다. 해탈에 대한 기대조차 가질 수 없는 백척간두 끝엔 무엇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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