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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 폴라니라면 트럼프 현상에 대해 뭐라 했을까

1. 개인의 시대, 공동체의 해체

20세기 후반, 신자유주의는 하나의 시대정신으로 자리잡았다. 하이에크와 프리드먼이 설계한 시장 중심의 질서는 1990년대 이후 '세계화'라는 이름 아래 전 지구적으로 확산되었다. 이 과정에서 시장은 단순한 재화 교환의 공간이 아니라, 인간 삶의 모든 영역을 조직하는 주체로 탈바꿈했다. 칼 폴라니가 『거대한 전환』에서 경고했듯, "경제가 사회로부터 분리될 때, 사회는 파괴된다."

하지만 이 새로운 시장 질서가 작동하려면, 전통적인 공동체 구조—가족, 종교, 국가, 도덕, 관습—는 장애물로 간주되어야 했다. 왜냐하면, 시장은 **'자유로운 개인'**의 상호작용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이 자유로운 개인은 공동체의 소속보다 선택과 소비로 정체성을 구성해야 하며, 감정과 신념 역시 사적 영역에 머무를 것을 요구받는다. (이 부분에 대한 좀더 구체적인 글은 여기에. 시장 중심의 세계관에서 개인은 가치함수로 형해화된다. https://brunch.co.kr/@96d4929c76b8441/16)

2. 정치적 올바름과 시장의 합리성

이 지점에서 '정치적 올바름(PC주의)'은 의외의 방식으로 이 세계관과 조응한다. 표면적으로, PC주의는 약자의 권리와 존엄을 옹호하는 진보적 이념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 작동 방식은 오히려 시장 이념과 기묘하게 닮아있다.
PC주의는 사회적 발언과 표현을 규제하는 기준을 공통 규범이나 전통적 도덕이 아니라, 개인의 심리적 불쾌감에 둔다. "누군가 상처받을 수 있으니 말하지 마라"는 원칙은, 규범적 판단을 사적 감정으로 대체하는 셈이다.

이는 마치 시장에서의 '선호'와 같다. 어떤 상품이 '좋다'는 것은 더 이상 객관적 미덕이나 품질이 아니라, 다수 개인의 심리적 만족을 반영한다.
즉, PC주의는 전통의 해체를 정당화하며, 개인의 감수성과 선택을 새로운 규범의 토대로 삼는다.

이 점에서 PC주의는 단순한 진보주의가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주체 형성의 문화적 버전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신자유주의의 교주가 PC주의를 의도적으로 퍼뜨렸다는 그런 음모론을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둘이 합이 맞았달까.

3. 폴라니의 ‘이중운동’과 반격의 징후

칼 폴라니는 시장의 확장이 공동체를 붕괴시키면, 반드시 ‘이중운동(Double Movement)’, 즉 사회의 방어적 반작용이 발생한다고 보았다. 유럽을 휩쓸었던 전체주의의 망령은 단순한 광기가 아닌, 어떤 면에서는 '사회'라는 인간 삶의 생태계가 시장에 의해 파괴되었을 때 나타날 수 있는 방어적 현상일 수 있다는 것이다.
시장 중심의 세계화가 일상적 삶의 질서를 위협할 때, 사회는 다시 도덕, 공동체, 안정성의 이름으로 저항에 나선다.

오늘날 ‘반-PC주의’의 흐름은 단순한 보수 반동이 아니라, 바로 이 이중운동의 징후로 읽을 수 있다.

남성성과 민족 정체성의 복원,

기독교적 가치의 재주창,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의 탈규제 요구,

SNS 검열에 대한 저항 등은 모두, 공동체적 감수성과 고정된 질서에 대한 회귀 본능을 반영한다.


4. 그러나, 반격조차 상품이 된다

문제는 이 반격마저도 시장에 포섭된다는 점이다. '전통'은 이제 하나의 콘텐츠가 되고, '불쾌함에 대한 저항'은 브랜드가 된다.

보수 유튜버는 '깨진 정치적 올바름'을 팔고,

‘백래시(backlash)’는 클릭을 유도하며,

반-진보 정치인은 ‘정체성 피로’를 상품화한다.


이는 폴라니가 예상한 이중운동의 희석된 형태다. 진짜 공동체 회복이 아닌, 시장 안에서의 또 다른 소비의 형태로 재구성되는 것이다.

5. 트럼프 현상: 이중운동의 시장화된 정치

트럼프의 지지 현상은 이 모든 복합적 흐름의 정점이라 할 수 있다.
그는 반-PC 담론의 전위에 서 있으면서도, 동시에 그 언어와 이미지를 철저히 시장적으로 활용한다.

“나는 당신의 분노를 이해한다”는 메시지는 공동체적 불안을 대변하는 듯하지만,

그 해결 방식은 늘 거래적이고, 미디어적이며, 감정 자극적이다.


트럼프는 공동체의 해체에 반발하는 군중에게 하나의 상품으로서의 정체성을 제공한다. 전통의 복원을 약속하지만, 그 실현 방식은 오히려 시장적 감각에 충실하다. 이처럼 트럼프는 이중운동의 시장화를 가장 성공적으로 수행한 정치적 브랜드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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맺으며

PC주의와 반-PC주의, 진보와 보수, 감수성과 표현의 자유는 모두 언뜻 이념의 대립처럼 보이지만, 더 깊이 들여다보면 동일한 시장 구조의 양면일 수 있다.
폴라니는 ‘경제가 사회를 포획할 때, 사회는 무너진다’고 했지만, 현대 사회는 이제 그 무너짐조차 하나의 콘텐츠로 소비하고 있다.
우리는 과연 그 시장의 논리를 넘어선 공동체적 삶을 다시 상상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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