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기하는 뇌 - 2) 해마: 기억의 휴게소

기억 센터인 해마를 이야기하기 전에, '기억'이란 건 정확히 무엇인지 얘기해보자. 예를 들어 볼께. 우리가 시험 기간에 한국사를 공부한다고 하자고. 우리는 "고종은 1924년 아관파천하여... " 이런 내용을 책에서 보고, "고종-아관파천" 이런 식으로 머리 속에 기억을 만들어. 나중에 시험 문제에 "고종이 을미사변 후 러시아와 손잡은 사건?" 이런 내용을 보면 "아관파천" 이라고 답을 할 수 있은거지. 이 예에서 볼 수 있듯이, 기억한다라는 건 한 개념과 다른 개념을 연결(연합)시키는 것이고, 기억이란 이 연결체 자체를 의미해. 그리고 이 연결체의 일부가 문제(단서)로 나오면, 기존의 연결을 통해서, 단서와 연결된 다른 개념을 떠올릴(인출)할 수 있게 되는거야.
이 개념 간의 연결을 만들어내는 기억의 공장이 해마라는 곳이야. 이 해마는 그림에서 보는 것처럼, 두뇌의 안쪽에 두 길쭉한 모양으로 존재해. 이 해마라는 곳은 정확히 어떤 방식으로 기억을 만들어낼까? 또 아관파천의 예를 들어보자. 이 해마에는 수많은 신경세포(뉴런)들이 존재해. 편의상 이 중 한 신경세포 a는 고종이란 개념을 담당하는(표상)한다고 해보자. 쉽게 말해서, 고종이란 단어를 보면 이 신경세포에 불이 켜지는거야. 또다른 신경세포 b는 아관파천이란 개념을 담당하고. 우리가 해당 내용을 공부할 때, 고종 뉴런, 아관파천은 "동시에" 활성화돼. 여기서 엄천 중요한 원리가 하나 있는데, "hebbian rule"이란거야. 무척 쉬운 원린데, 인접한 두 뉴런이 동시에 활성화되면 두 뉴런 사이의 연결 정도가 강해진다는거지.자 그럼 이제 고종 뉴런과 아관파천 뉴런은 동시에 활성화되고, 헤비안 러닝 규칙에 따라 두 뉴런을 잇는 연결은 강해질거야. 이 두 뉴런 사이의 연결 자체가 새롭게 생긴 "고종-아관파천"이란 기억의 정체야. 이 연결이 확실할 수록, 시험 문제를 맞출 확률이 높아지고 말야.
비유하면 해마는 일종의 폴라로이드 사진기 같은거야. 경험한 내용에 대한 즉석 기억을 바로 바로 만들어내는. 오늘 저녁을 먹은 식당의 이미지를 바로 떠올릴 수 있는것도 해마의 신경세포들이 서로 연결을 만들어 하나의 기억 덩어리를 만들었기 때문이야.
이렇게 놀랍게 효율적인 기억 시스템이 진화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우리가 구석기 시대의 인류였다면 기억의 가장 주된 과제는 무엇이었을거 같아? 하루 종일 돌아다니면서 어느 나무에 먹을만한 열매가 열리는지, 어느 동굴에 사나운 곰이 살고 있는지 이런 것들을 기억하는 것이 생존에 가장 중요한 과제였을거야. 다시 말해, 특정한 공간과 먹음직한 음식, 포식자 같은 사건들을 '연결시켜 기억하는 것'이 정말 중요한 일이었을거란 얘기야. 그리고 이런 기억은 정말 빨리 만들어져야해. 근처 동굴에 곰이 산다는 사실을 배우기 위해 여러 번의 경험이 필요하다면 어떻겠어? 기억을 만들기 전에 세상에서 사라지지 않았을까. 어쨌든 우리는 생존을 위해 진화된 "빠른 해마 기억 시스템"이란 도구를, 이제 공부를 위해 쓰고 있는거야.
진화라는 무명의 엔지니어의 힘은 정말 놀라워. 이제 우리가 인간의 두뇌를 설계하는 엔지니어의 입장이 되어 생각해보자. 해마의 설계는 분명 꽤 만족스러울거야. 폴라로이드처럼 기억을 보는 족족 찍어내는 기억이라니, 대단하잖아. 그런데 그렇게 해마를 탑재한 아담이란 베타 모델을 만들어서 시운전을 해보니까 생각치 못한 문제가 생기는거야. 분명 배우는 건 엄청 빠르긴 한데, 잊어버리는 것도 빛의 속도였던거지. 왜 그랬을까? 이 빠른 망각은 해마가 가진 높은 학습 능력의 어쩔 수 없는 구조적인 그림자였던거야.
우리는 빠른 학습이 가능하게 하기 위해서 해마에 연결이 쉽게 형성되는 종류의 신경세포들을 집어넣었어. 그래서 '나무' 세포와 '열매' 세포가 바로 바로 연결이 됐던거지. 나무에서 매일 열매를 잘 따먹던 아담은 어느날 나무 아래에서 '뱀'을 발견했어. 아담의 해마에 있는 '나무' 세포는 '뱀'과 새로운 연결을 만들었지. '열매'로의 연결은 상대적으로 약해진 셈이지. 그래서 이제 아담은 집 앞의 나무를 보면 열매보다는 뱀을 떠올리게 된거야. 가장 최근의 경험에 의해, 이전의 기억이 덮어 씌워진거지. 이런 현상을 '간섭에 의한 망각'이라고 하는데, 해마의 빠른 학습 능력은 어쩔 수 없이 빠른 망각을 가져올 수 밖에 없는 거야. 게다가 이전과 최근의 기억이 유사한 경우, 이 망각은 거의 재앙적이야. 예를 들어, 나는 오늘 저녁에 매일 가는 식당에서 김치찌개를 먹었어. 그런데 당장 어제 같은 식당에서 뭘 먹었는지는 도저히 기억이 나지 않아. 이렇게 해마는 빠르게 배울 수 있도록 설계되었지만, 그 대가로 오래 기억할 수 없게 설계된 셈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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