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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드 보이

by 원진

모두들 그런 경험을 한 적이 있지 않은가?

책장이 항상 거기 있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딱 지금 읽어야 할 책이 보이는 순간을

영화도 마찬가지다.


그게 바로 올드 보이였다


박찬욱 감독님의 영화를 많이 보지 않았다.

하지만 그가 만들어내는 아름다움과 처절함의 균형은

늘 어딘가를 간지럽히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그날, 올드보이를 틀었다.

그리고 어디서부터, 무엇을 말해야 할지 모를 정도로

알 수 없는 감정들로 가득 찼다.


특히 이우진.

그의 고통은 너무 깊어서,

그조차도 그 고통에서 벗어날 방법을 몰랐다.

그래서 그는 복수를 택하지 않았을까?


통제할 수 없는 고통을 통제하기 위해

신과 같은 모습을 하기 위해

고통을 가두고, 시간마저 지배하려는 모습들이


“처절한 고통이 이렇게까지 아름다울 수가 있을까?”


미장센을 칭찬하면 끝도 없겠지만

하지만 특히 물의 구조는

박찬욱 감독님과 내가 좋아하는 것이 일치하는 순간이었다.

물은 흐르기도 하고, 가두기도 하고,
생명을 주기도 하지만, 죽음을 가져가기도 하는

그 공간을 가둬버리면서

그 물은

이우진의 마음이 갇힌 감옥처럼 보이기도 했다.

생명이 없는 권력의 공간

권력의 의미를 잃은 권력이 존재하는 공간 말이다.


이우진은 철저하게 복수를 계산했다.
심판자처럼

하지만 본인도 수단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는 권력을 쥔 심판자였지만, 동시에 복수의 감옥에 갇힌 죄수였다.


철저하게 오대수를 감금하고, 그 속에서 작은 자유까지계산했다.


진실을 가두고, 감정을 가두고, 기억을 가두고


첫 번째로 오대수의 시간을 가져갔다.

오대수가 본인에게서 가져간 것처럼


두 번째는 비밀

이우진은 철저하게 비밀을 본인의 통제안에서

사용하려고 하고 있었다.

그것은 권력이었다.

진실을 감추고,

적절한 순간에 선물처럼 풀어 높음으로써

상대를 완전히 무너뜨릴 수 있는 권력


비밀을 감금한다는것은 권력이라고 생각했다.


세 번째 죽음의 통제


모든 걸 끝낸 후, 스스로 생을 마감했다.

죽음도 그의 계획의 일부분이었다고 생각이 든다.

결국 신의 모습을 한 이우진이 심판을 내린 후 사라지는 것이다.


애초에 용서를 바라지 않았다.

이 복수는 교환적 복수가 아닌

‘완전한 종결’을 원하는 이우진의 계획이다.


이우진은 복수를 통해

완벽한 그림을 그렸다.

그의 목적은 오대수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와 나,

둘 모두가 고통을 나누는 마지막 장면을 완성하는 것


그리고 작품이 완성되자,

그는 그 안에서 스스로 사라졌다.


결국 신의 존재가 될 수없었던 이우진의 신놀이가 끝나고,

오대수는 인간이하로 전락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을 지켜본 관객들은

불쾌한 침묵과 처절한 감정 속에서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만약 내가 심판대에 오른다면

나는 어떤 말을 할 수 있을까?


인간이라는 존재가

순수와 악을 오가는 존재이고

의도하지 않았으나

때로는 물리적으로,

때로는 정신적으로 누군가를 살인한다.


하지만,

그런 존재에게도 살 권리는 있는 것은 아닐까?

오대수의 편지에서

감독의 진심을 엿보았다.


별 의미 없던 행동이

누군가를 해치고

그랬다는 것을 망각하면서 살아가다가

우리가 심판대에 올라갔을 때

우리가 가장 할 수 있는 말이 아닐지


결국 그의 영화를 사랑하는 이유도


완벽한 캐릭터는 흥미롭지 않다는 점이다.


결함과 욕망을 숨기지 않는,

그런 인간적인 인물만이

나에게 숨 쉬는 감정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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