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코롤드 갤러리 패밀리 데이
코롤드 갤러리를 가본 건 나도 처음이었다. 여행을 준비하는 기간에 그 존재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여행 기간을 여유있게 잡고 오니 이런 점이 좋았다. 모두가 꼭 가는 유명한 곳 말고 다른 곳도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여유를 부려도 되는 것. 서머셋 하우스의 한켠에 작은 출입구가 코롤드 갤러리로 들어가는 입구인데, 내셔널 갤러리, 테이트 브리튼 처럼 그리스식 기둥이 줄지어 서있는 거창한 입구가 아니라서 '여기는 아는 사람만 들어가는 곳'이라는 특별한 감정이 들기도 한다.
런던에 무료 입장이 되는 미술관이 그렇게 많은데, 굳이 돈 내고 들어간다고? 라고 묻는다면, 작품 컬렉션이나 어린이들을 위한 체험에 있어서 그 이상의 가치가 넘치는 곳이니 꼭 가야 한다라고 말해주고 싶다.
코롤드 갤러리에는 금요일마다 어린이를 위한 패밀리데이가 준비되어 있는데, 여러 형태의 예술 체험을 할 수 있고, 무료 체험임에도 그 퀄리티가 상당하다. 백팩 트레일, 그림 속 동물 찾기, 코롤드 갤러리 내 인테리어 디자인과 디테일 요소들을 관찰 한 뒤, 자기만의 드림 하우스를 만들어 보는 것까지.
1층 입구에는 어린이들을 위해 준비된 데스크가 있는데, 여기에는 그림 감상을 돕는 소품들이 든 백팩, 각종 색종이와 색연필, 어린이를 위한 리플렛 등 관심있는 활동 도구들을 골라 갈 수 있다.
담율이는 백팩을 하나 매고, 마음에 드는 색지와 색연필을 잔뜩 챙겨서 관람을 시작했다. 가방에 담긴 소품들이 전시를 재밌게 관람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데, 시각, 촉감, 청각, 후각 등 다양한 감각을 그림과 연결하여 감상할 수 있다. 중세 갤러리 Medieval Gallery에서는 그림을 그리는 방식을 설명하는 주머니를 연다. 주머니에는 계란 모형과 금박, 귀한 청색을 만들었던 라피스라줄리 원석이 들어가 있다. 염료를 계란과 섞어 접착력을 높였던 에그 템페라 방식과 그림의 화려함을 더했던 금박 그림 앞에서 재료들을 보면서 설명을 해주면 훨씬 재미있게 설명을 들었다.
다음에는 청각. 루벤스가 그린 달빛 아래 풍경을 보면서 가방 속 헤드셋으로 소리를 듣는다. 풀벌레소리, 물소리, 바람소리. 정말 달빛, 별빛이 반짝이는 강가에 있는 것 같다. Peter Paul Rubens, Landscape by Moonlight 빠져 든다. 빠져 든다. 잠시 아이의 헤드폰을 빌려 음악을 들으면서 그림을 보고 있으니 풍경속으로 빠져들어 가는 것 같다.
다음에는 촉각 주머니를 열어보자. 귀족들이 시집갈 때 귀한 실크와 벨벳, 액세서리등을 담아갔던 함이 전시되어 있다. 시집가는 딸의 면을 세워주기 위해 애썼던 것은 서양이나 동양이나 별 반 다를 게 없구나. 이 곳에서 열어 볼 주머니에는 실크와 벨벳 조각이 들어가 있다. 직물의 부드러운 질감을 느껴보고, 직물의 패턴 디자인도 관찰할 수 있다.
전시품에서 후각은 어떻게 경험할 수 있을까? 준비된 꾸러미에는 사탕 수수 향, 은 식기를 닦을 때 주로 사용했던 레몬주스 향 등을 맡아 볼 수 있도록 고체 향수가 준비되어 있었다. 반짝거리는 은식기 중 커피 주전자, 설탕 그릇, 디저트 접시 등을 보며 그 시대 설탕 무역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이렇게 준비된 도구들을 활용하니 어린이뿐만 아니라 어른들도 훨씬 재미있게 관람할 수 있었다.
이렇게 오감을 이용한 관람 도구 이외에도 그림 속에 숨겨진 동물들을 찾고 따라 그릴 수 있는 리플렛도 준비되어 있었다. 바닥에 앉아 그림에 나오는 동물들을 따라 그려본다. 국내에서 대형 전시가 있을 때마다 어두운 공간에서 줄지어 관람하면서 쉿! 그만! 하지마! 이런 분위기에서 관람을 해야 하는 것이 늘 아쉬웠는데, 밝은 빛이 드는 공간에서 마루바닥에 편하게 앉아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한 자리에 오래 머물며 충분히 시간을 들여 관람할 수 있는 분위기, 여행을 오기 참 잘했다라고 느낀 순간들이었다.
코롤드 갤러리 관람을 마치고 1층으로 내려오면 직원의 안내를 따라 작업실 같은 공간으로 이동한다. 그 곳에서 나만의 공간 만들기를 해볼 수 있다. 박스를 하나씩 나누어 주었고, 여기에 여러 가지 색지와 펀치, 잡지에서 뜯어낸 이미지들, 색실, 와이어 등을 활용해서 드림하우스를 꾸밀 수 있다. 선생님은 고흐의 방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샘플을 보여주셨고, 온통 핑크로 꾸민 작품, 트로피컬 컨셉으로 꾸민 작품 등 저마다 다양한 컨셉으로 열심히 집을 꾸미고 있었다.
담율이는 고양이를 위한 드림 하우스를 만들었다. 과감하게 까만색 반짝이 종이로 벽지를 바르고, 와이어를 꼬아서 그네처럼 매달린 그네와 징검다리를 만들었다. 벽에는 밤하늘에 반짝이는 별들처럼 장식을 붙여 넣었다. 이럴 때 아이들의 발상은 어른들의 고정 관념을 잘 넘어선다.
아이들의 창작을 도와주는 선생님이 3분 계셨는데, '어바웃 타임'의 주인공 같았던 빨강 머리 아저씨, 목소리까지 러블리했던 브리티쉬 선생님이 주제를 물어보기도 하고, 필요한 재료를 가져다 주고, 응원도 해주고, 라즈베리 펀치도 한 컵 가득 따라 주었다. 편안하고, 뭐든지 가능한 이 창작 교실의 분위기 자체가 너무 좋았다. 9살에 이런 분위기를 경험해 보는 담율이가 너무 부러울 지경이었다.
"What a brilliant idea!"
고양이를 키우고 있어?
아니, 고양이 키우는 게 꿈이야.
아, 진짜 너의 드림 하우스구나!
만들기 활동을 하느 동안에는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하는 담율이는 옆 테이블의 아이가 계속 바뀌는 동안에도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만들기에 집중했다. 그리고는 디테일까지 멋지게 드림하우스를 완성해 냈다.
조금은 낯선 코롤드 갤러리라는 이곳의 이름은 런던의 직물업자인 새뮤얼 코롤드 Samuel Courtauld, 1876-1947에서 따왔다. 그는 빅토리아 시대에 세계시장에서 흥했던 영국의 섬유산업을 통해 엄청난 부를 축적한 재력가였고, 개인적으로 모은 작품으로 갤러리를 열었다. 코롤드는 1917년 런던 내셔널 갤러리에서 열린 파리 인상파 화가전을 보고 인상파에 푹 빠지게 되었고, 마네, 모네, 르누아르, 세잔, 고갱, 고흐 등을 특히 좋아했다고 한다. 마네의 <폴리 베르제르의 바>, 드가의 <무대 위의 두 댄서 Two Dancers on a Stage>, 고흐의 <귀를 자른 자화상Self-Portrait with Bandaged Ear> 등 세계적으로 명성을 가진 그림들을 비롯해 르누아르, 드가, 쇠라 등 프랑스 인상파 작품들이 집중적으로 전시되어 있다. 코롤드는 자신과 뜻을 같이 하는 지인들과 힘을 합해 자신의 이름을 딴 미술학교인 코롤드 인스티튜트 오브 아트 The Courtauld Institute of Art를 세웠고, 이 학교의 부속 갤러리를 만들어 자신의 소장작들을 기증했다. 여기에다 몇몇 컬렉터들의 기증작을 더해서 1932년 코롤드 갤러리가 본격적으로 문을 열었다고 한다.
눈 앞에서 이런 그림들을 직접 본다고?! 나는 흥분 지수가 올라가고 있지만, 아이의 집중력은 아쉽게도 배낭 속 준비된 자료들이 끝나는 2층에서 다 소진되어 버렸다. 오래 오래 감상하고 싶은 그림들 투성이였지만, 이제 집에 가고 싶다는 아이의 보챔때문에 쇼츠 보듯 슥슥 지나가며 재빨리 눈으로 담았다. 그러면서 결국 아이에게 짜증을 내고 말았다. 너가 재미있었던 만큼 엄마도 즐겁고 싶어! 엄마도 이 순간을 엄청 기대하고 많이 준비해 왔다고! 아이는 이내 주눅이 들어서 홀에 준비된 의자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버럭 화를 내고 나니 그림이 생각보다 감동으로 다가 오지 않았다. 다행히 우리 서로 좋아하는 것들을 존중해주면서 배려해 주자.라며 훈훈하게 마무리를 했다.
그만큼 코롤드 갤러리는 갈 만한 가치가 넘친다는 결론이다. 에너지 넘치는 9살 어린이의 힘을 쏙 빼놓을 정도로 볼거리, 할거리들이 많은 곳. 천정 실링 장식, 문 손잡이, 코발트 블루 컬러의 계단 난간까지 예뻐서 구석 구석 구경하느라 진이 다 빠질 수도 있는 곳. 여기에 지하 갤러리 숍 까지 멋져서 인테리어 편집숍처럼 예쁜 물건들이 가득했다.
지금 코롤드 갤러리에는 웨인 티보의 전시가 내년 1월까지 이어지고 있다. 또 가고 싶다. 코롤드 갤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