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거의 모든 식물

영국 왕립식물원 큐가든 KEW Garden

by 풸롱

식물 사냥꾼들의 나라, 영국


호주에 처음 갔을 때, 너무 강렬해서 지금도 몸이 기억하고 있는 인상을 받은 곳은 공원에서였다. 태평양 한 가운데 똑 떨어진 남반구의 섬 호주는 지금까지 본적 없는 식물들 천지였다. 하늘까지 닿을 듯한 큰 나무와 너무 거대했던 관목류, 고사리류의 잎사귀들이 낯설어서 소름이 돋았고, 대자연이 주는 압도감에 약간 무서운 기분마저 들었다. 숲에 들어간 것도 아니었고, 도시와 연결 된 큰 공원에 갔을 뿐인데도 말이다. 열대 우림 깊은 숲에 들어 간다면? 거기에서 극락조나 비단 앵무 같은 새를 만난다면? 호주에서 느꼈던 이질적 경험의 충격이 몇 배쯤은 더 했겠지?


지금은 많은 경로를 통해서 다른 기후군의 동식물에 대한 정보가 많음에도 실제 경험했을 때의 신비롭고 경이로울 텐데, 많은 정보가 없던 과거에 이국적인 식물을 처음 본 사람들이 느꼈을 낯설고 진귀한 경험은 그것들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구로 이어졌을 것이다.


세계 각지로 식민지를 확장하던 18세기 영국은 ‘식물 사냥꾼’을 보내 세계 각지에 있는 유용식물 및 희귀 식물을 수집하였고, 이렇게 수집한 식물들을 기후에 맞지 않는 런던에서도 키우기 위해 식물원을 만들기 시작했다. 전세계에서 다양한 식물을 수집하고 품종을 개량하는 것은 영국 국가 차원에서 주도하던 일이었는데, 런던원예학회(1805년), 왕립식물학협회(1839년)를 설립함으로써 식물학이 더욱 융성해졌다. 차, 고무나무, 커피, 카카오 등 경제가치가 높은 유용식물 자원은 식물원에서 품종을 개량하여 재배한 후, 식민지에 다시 가지고 가 대량으로 키워 부를 창출하는 대규모 농장을 경영하기도 했다. 싱가포르 보타닉 가든에서 동일한 내용을 접한 적이 있었다. 영국식 정원으로 꾸며진 싱가포르 보타닉 가든의 설명판에 의하면 싱가포르가 개량된 고무나무가 전세계로 퍼지는 전초기지였다.


영국 왕실을 비롯한 상류층에서는 진기하고 아름다운 식물들을 얻고자 했고, 이러한 흐름에 따라 빅토리아 여왕 시대 ‘큐 왕립식물원 Royal Botanic Gardens, Kew)이 만들어졌다. 현재 큐 가든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는데, 세계 식물 종의 10분의 1에 해당하는 700만 종 이상의 종자를 보유하고 있는 종자 은행이자 3만여 종이 넘는 식물이 관리되고 있다고 한다. 또한 700여 명의 정원사와 상주 과학자들이 세계의 식물을 보호하고 연구하고 있는 곳으로 세계의 식물원과 NGO들과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다고 한다. 누군가는 이렇게 얘기하기도 한다고 한다.


세상이 멸망해도 큐가든만 남아있다면 현재의 식물 생태계를 다시 살려낼 수 있다고.




식물이 주는 아름다움, 큐 가든


큐 가든을 가기로 계획한 날, 런던 지하철 파업이 있었다. 런던 센터에서 서쪽으로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어 이동 시간은 어느 정도 감안하고 있었지만, 엄청나게 딜레이 되는 버스들만 타고 갔다오려니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런던 여행을 준비하면서 기대치로 따지면 다섯 손가락안에 드는 곳이었다. 영국 유학 시절, 기숙사 같은 층에 살던 영국 여자아이가 있었는데, 주방에서 만나면 가볼 만한 곳들을 종종 소개해주곤 했다. 그 중에 눈에 잔뜩 힘 주어 추천해 줬던 곳이 큐가든이었다. 20대의 나는 식물에 크게 관심이 없었을 때라 언젠가는 가야지 하다가도 결국엔 못가서 아쉬웠던 곳이었다.


그 후 큐가든이 좀 더 궁금해지는 계기가 생겼다. 한 참 아크릴화 그리는재미에 빠져 있을 때, 주로 그림을 그린 소재가 트로피컬 식물들이었다. 직접 찍은 사진 이외에도 그리고 싶을 만한 식물들을 찾아 구글링하다가 큐 가든의 오래된 온실 팜 하우스 사진을 찾았는데, 그 공간이 너무 마음에 들어 세 점이나 그림으로 그렸다.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온실이기도 한 팜 하우스의 그림을 그리면서 꼭 여기는 직접 가서 보고 싶다라는 생각이 더해졌다. (팜 하우스 Palm House는 1848년 빅토리아 여왕 시대에 데시무스 버튼의 설계로 지어졌다.)


큐가든의 팜하우스를 그렸던 그림



팜하우스에 들어 갔을 때, 디테일까지 정성스레 화폭에 옮겼던 장소가 그대로 펼쳐지면서 내가 창조한 세계 속에 들어오는 것 같아서 기분이 참 묘했다. 내가 그림으로 묘사했던 그 사진 속 식물들보다 더 많이 자라서 복도를 거의 덮기 직전이었지만 구성은 그대로였다. '너가 그 식물이구나.'

오래 된 만큼 구조물은 많이 녹슬었지만 싱그러운 초록과 어우러진 모습이 아름다웠다. 붓으로 디테일을 하나 하나 표현했던 계단을 타고 위층으로 올라가니 온실의 뜨거운 공기와 수증기가 더욱 후끈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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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으로 담았었던 팜하우스의 구조물과 식물들


큐 가든의 매력은 온실에만 있지 않다. 파란 하늘과 초록색 잔디 배경으로 아름답게 서 있는 붉은 색 큐 팰리스는 조지 3세가 거주 했던 곳이라고 한다. 메이드 복장을 한 안내직원들이 친절하게 안내와 설명을 해 주고 있다. 프랑스의 화려한 궁전들을 보고 와서 그런지 큐 팰리스는 소박하기 그지없었다. 팰리스라기 보다 소박한 지방 귀족의 저택 정도로 느껴졌다. 하늘 높이 가지를 뻗은 전나무들 사이로 산책할 수 있는 트리탑 워크웨이(Treetop Walkway)로 올라가면 나무 가지들을 타고 다니는 다람쥐도 볼 수 있다. 팜하우스 뒷편에는 온갖 컬러, 모양, 향기의 장미가 가득한 로즈 가든이 있다. 과일과 야채로 가득한 키친 가든은 또 어떻고. 탐스러운 호박과 가지, 토마토가 가지마다 주렁주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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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 팰리스, 트리탑 워크웨이, 로즈가든


큐 가든을 돌아보면서 특이한 점은 검은색 꽃과 잎사귀가 종종 눈에 띈다는 것이었다. 식물학계에서는 천연 발생되는 검은색 꽃은 없다는 것이 정설이라고 한다. 꽃의 컬러를 결정하는 카로티노이드 플라보노이드 베타레인 클로로필의 유전자 이론으로는 블랙 컬러가 나올 수가 없고, 많은 원예가들이 블랙 컬러의 품종들을 개발하고 있다. 종자 은행이면서 신품종 개발에 특화 된 큐가든이어서 그런 지 블랙 컬러의 식물들이 유독 눈에 많이 띄었다. 연못가에 심겨진 블랙 페튜니아는 유럽에서 인기가 높은데, 원래는 식물원에서만 볼 수 있던 귀한 품종이었고, 최근 들어 고급스럽게 가꾸는 개인 정원에 많이 심어지고 있다고 한다. 식물이 주는 아름다움이 이렇게나 다채롭다.



KakaoTalk_20251021_125501528_12.jpg 검정색 페튜니아를 본 적 있나요


엄마, 외할머니는 여기 오면 하루 종일도 있겠어.
하루가 뭐야. 여기서 살려고 할지도.




다음에 또 찾게 될 곳이라는 느낌이 왔다.


저녁에 라이온킹 뮤지컬을 예약해 놓아서 정원을 여유롭게 둘러 보지 못하는 마음이 내내 아쉬웠다. 지하철 파업 중이라 가는 시간이 가늠이 안 될 정도여서 충분한 여유를 가지고 출발해야 했다. 제대로 된 점심도 못 먹고 종종거리면서 다녔음에도 절반도 둘러 보지 못했다. 어린이 정원(Kew's Children's Garden)은 들어가는 순간 몇 시간은 그냥 보낼 것 같아서 일부러 아이 눈에 띄지 않게 돌아갔다.


바쁜 와중에도 기념품숍은 빼먹을 수 없지. 각종 씨앗들을 판매하는데 그 형태가 재미있었다. 식물 한 가지씩 담긴 패키지 이외에도 같이 심으면 좋을 만한 구성으로 조합되어 있는 패키지도 있었는데, 자연적인 어우러짐에 가치를 두는 영국식 가드닝에 어울리는 제품의 형태인 것 같았다. 벌에 대한 섹션도 따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벌에 대한 책, 벌을 문양으로 장식한 패브릭 제품들, 그리고 한 켠에 꿀도 같이 판매하고 있었다. 가드닝을 위한 도구와 옷가지들, 가드닝과 식물, 정원에서 관찰할 수 있는 동물들에 관한 책이 구비되어 있었다. 영국 왕실의 인장이 찍힌 비누, 로션도 향이 다양했는데, 고르기 힘들 정도로 매력적인 향이 많았다.

자연물을 소재로 한 악세서리들도 많았는데 그 중에서 연꽃모양으로 비즈 자수를 둔 브로치와 열쇠 고리들을 골랐다. 식물원 기념품숍에서 사고 싶은 물건들 대부분이 있는 곳이었다.


다음에 꼭 다시 오겠다는 다짐을 여러 번 하게 되었다. 꽃과 식물들 사이에서 살다 죽을 거라는 '목표'를 가진 엄마와는 꼭 다시 한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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