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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울메이트 Oct 22. 2024

『산티아고 순례길 인문기행』
 18. 이정표의 노예들

     (제16일 차 /  프로미스타~카리온 데 로스콘데스)


♧ 오늘의 코스 


    오늘(10.10)은 프로미스타(Fromista)를 출발하여 ▷ 포블라시온 데 캄포스(Poblacion de Campos) ▷ 비야르 멘 테로 데 캄포스(Villarmentero de Campos) ▷ 비얄카사르 데 시르가(Villaalcazar de Sirga) ▷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Carion de los Condes)까지 총 18.8km를 4시간 30분 동안에 이동하면서 3만 7천 보를 걸었다. 거리는 짧지만 지루한 순례길이라서 순례자들과 대화를 나누며 걸었다.



♧ 순례자의 버킷리스트  


   우리 부부는 프로미스타 마을을 벗어나 A-67 고가도로를 건너서 차로의 옆길을 따라 나있는 비포장도로를 걷다가 이스라엘에서 왔다는 젊은 여성과 대화를 나누었다. 그녀는 기독교 신자로서 예루살렘, 로마, 산티아고의 3대 순례길을 완주하는 것이 자기의  버킷리스트라고 말했다. 

  예루살렘 순례길은 600미터 정도로 짧아서 거의 일상적으로 순례하였다. 이번에 산티아고 프랑스 길을 40 동안 완주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5년 전에 퇴직한 후 나는 중국 전역을 배낭여행으로 소화한다는 원대한  희망을 버킷리스트에 올려놓고 실천에 들어갔다. 그 하나를 4회 135일 동안 중국을 다녀왔다. 65세 때 주민복지센터에서 중국어를 2년 동안 배우고 장도에 올랐다. 중국인들은 내 중국어를 알아듣지 못해 소통하는 데 큰 도움은 되지 못했다. 내가 배운 중국어는 표준어인 북경어였는데, 내가 30일 동안  자유여행을 갔던 지방은 광동지방이었다. 알고 보니 광동지방에는 표준어와는 생판 다른 광동어가 따로 있었기에 의사 소통하는데 어려움이 있었다. 자유여행의 성격상 오지를 찾아가 느긋하게 지내고 싶었지만 그 오지에는 소수민족이 살고 있었는데 그들의 고유한 언어를 모르는 나는 그들과 소통하는데 애로가 많았다.    

   브라질을 여행할 때도 포르투갈어를 몰라 고생깨나 경험했다. 영어로는 거의  소통이 안 돼 혼난 적이 있다. 포르투갈어는 태어나 금시초문이었기 때문이다. 상파울루에서 이과수 폭포를 거쳐 아르헨티나로 넘어갔는데 그 나라에서는 스페인어를 쓰고 있어서 고생깨나 하고 돌아다녔다. 그때를 생각하면 아찔하고 낯부끄럽다. 

 

  산티아고 프랑스 길은 유럽이라서 괜찮겠다 싶었지만 스페인에서 영어를 쓴다는 것은 북경어를 배운 사람이 광둥어를 쓰는 지방을 여행하는 것과 다름없이 불편하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5년 전 과거와는 지금의 여건은 달라져서 통역을 해주는 휴대폰 앱이 여행하는 그 나라 말을 한마디도 몰라도 지구촌 구석구석을 배낭여행 할 수 있는 편리한 세상이 되었다. 세상은 오래 살고 볼 일이다. 더욱 신나는 것은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은 거의 자기네 국어와  영어는 어느 정도 구사할 수 있는 사람들이라서 소통에 애로가 없어졌다. 다만, 알베르게나 식당에 가면  스페인어만 말할 줄 아는 스페인 사람들과 말할 때에는 휴대폰 통역기에 대고 말하면 통역을 해주니 여간 편리하지가 않다.  요즈음에 와서 느낀 점은 지난 40년 너무 많은 돈과 시간을 들여 외국어를 배우려고 애를 썼다는 사실이 억울하기만 다.   


♧ 순례자와 성모마리아의 분수  


   포블라시온 데 캄포스 마을의 전설에 따르면 건조한 해 어느 날 순례자와 마을 사람 모두가 물 부족으로 고생하던 차에 지친 순례자 그룹이 이 마을에 도착했다. 그들 중에는 작고 단순한 나무 십자가를 든 할머니가 있었다. 그녀는 구제를 간절하게 기도하며 마을 교회 근처 땅에 십자가를 심었다. 그녀가 십자가를 심은 곳에서 물이 흘러나와 맑은 샘이 형성되었다. 이 샘은 마을 사람들과 순례자들에게 필요한 물을 충분하게 제공함으로써 그들은 신의 축복을 받은 것으로 여겼다. 이 샘은 Fuente del Peregrino(순례자의 분수)로 알려졌고 치유력이 있다고 믿게 되었다. 순례자들은 이 샘물을 마시고 발을 씻으며 피로를 풀고 안도감과 체력을 회복하고 충전하여 순례여정을 계속했다. 


   빌라멘테로 데 캄포스 마을에는 색다른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중세 순례의 절정기에 순례자 무리가 지치고 배고픈 채로 마을에 도착했다. 그중에는 부모를 잃고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혼자 여행하며 위로와 안도를 찾으려는 어린 소년이 있었다. 어느 날 저녁, 순례자들이 쉬기 위해 자리를 잡았을 때, 소년은 근처 숲에서 나오는 부드러운 천상의 빛에 이끌려 떠났다. 소년은 하얀 옷을 입은 아름다운 여성의 모습을 보았는데, 그녀는 소년에게 친절하게 미소를 지으며 다가왔다.  그녀가 바로 성모 마리아였는데 그녀는 그에게 부드럽게 너는 혼자가 아니며 너의 여정이 축복받을 것이라고 안심시켰다. 그녀는 근처 장소를 가리키며 그에게 그곳을 파라고 지시했다. 그가 그곳을 파 헤치자, 작은 샘이 발견되었다. 이 샘의 물은 매우 맑고 상쾌한 맛이 있었기에 마을을 찾는 모든 순례자에게도 공급했다. 이 기적에 대한 소문은 빠르게 퍼졌고, 마을 사람들은 이 샘을 엔테 데 라 비르헨(성모의 분수)으로 부르고 순례자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13세기에 순례자 그룹이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여행하던 중 비야르카사르 데 시르가 마을 근처에서 산적에게 매복 공격을 당했다. 순례자들은 산타 마리아 라 블랑카 교회로 가서 피난처를 찾는데 신의 구원을 간절히 기도했다. 산적들이 다가오자 밝은 빛이 교회를 가득 채웠고 산타 마리아 라 블랑카로 알려진 성모 마리아 동상이 살아났다. 성모 마리아가 손을 내밀자 기적적으로 빛줄기가 그 손에서 나와 산적들의 눈을 멀게 하니 그들은  공포에 질려서 도망치고 말았다.  순례자들은 신의 구원을 받았고, 그들은 그들이 받은 구원을 산타 마리아 라 블랑카의 신성한 은혜로 돌렸다. 


  이 마을에 관련된 또 하나의 전설은 성모 마리아에게 깊이 헌신한 '블랑카'라는 젊은 귀족 여성에 관한 내용이다. 블랑카는 종종 이 교회를 방문하여 기도하고 신의 인도를 구했다. 어느 날, 그녀는 중병에 걸렸는데 지역 치료사들의 최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상태는 점점 악화되었다. 절박한 상황에서 그녀의 가족은 그녀를 교회로 데려갔고, 그녀를 산타 마리아 라 블랑카의 동상 앞에 눕히고 기적을 기도했다.  기도하는 동안 블랑카는 성모 마리아의 환상을 경험했다. 성모마리아는 블랑카에게 그녀가 치유될 것이라고 확신시켰다. 환상이 끝났을 때, 블랑카는 에너지가 솟구치는 것을 느꼈고 다시 일어나 걸을 수 있게 되어 완전하게 치유되었다. 


♧ 템플기사단의 최후


   평소보다 느긋하게 걸었지만 코스가 짧은 관계로 12시쯤 중간 목적지인 비얄카사르 데 시르가에 도착했다. 이 마을의 산타 마리아 성당은 13세기 템플기사단 (Templar Knights)에 의하여 만들어졌다. 기사단이 성당을 짓던 도중 건축용 석재를 도난당했는데 한 순례자가 범인으로 몰렸다. 그가 교수형 당하려는 순간 성모 마리아가 그의 발밑에 건축용 돌을 놓아주며 목숨을 건지고 무죄를 입증했다는 전설이 있다. 

  성당에 있는 성모상이 마치 임신한 것처럼 조각된 것 때문에 논란을 일으켰다고 한다. 그 실체를 살펴보니 정말 그녀의 배가 많이 부른 것 같았다.  하지만 성모 마리아는 생전에 임신하지 말란 법이라도 있냐고 따지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특이해서 순례객들의 이목을 불러 모으기에는 성공했지만 솔직히 말해서 성모마리아가 임신부라면 여러 가지 생각을 자아내게 하였다.                 

  

    (좌) 산타마리아 성당 

    (우) 임산부로 표현되어 문제가 된 성모상


   템플기사단은 중세 유럽의 기독교 군사 기사단 중 하나로, 1119년에 설립되었다. 이 단체는 원래 예루살렘 성지를 순례하는 기독교 순례자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시간이 지나면서 템플기사단은 군사 활동뿐만 아니라 경제적, 정치적 힘도 강력했다. 템플기사단은 주로 성지(예루살렘)를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방어하는 역할을 수행했다. 십자군 원정 동안에는 중요한 군사적 역할을 맡았으며, 성지와 유럽 간의 교통로를 보호했다. 

   템플기사단은 중세 유럽에서 최초로 은행과 유사한 시스템을 개발했다. 순례자들이 안전하게 돈을 보관하고 인출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대출과 같은 금융 서비스도 제공했다. 이로써 그들은 거대한 부를 축적하게 되었고, 많은 유럽 왕들과 귀족들이 이들로부터 자금을 빌렸을 정도였다. 템플기사단은 유럽과 중동에 많은 성채, 교회, 그리고 기타 방어 시설을 건설하여 힘을 축적해 나갔다.  이들은 고딕 양식의 건축물로 유명하며, 일부 건축물은 오늘날까지도 남아있다. 

  1307년, 프랑스의 필립 4세는 템플기사단을 해체시키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려 했다. 그는 기사단원들을 이단으로 몰아붙여 많은 수를 고문하고 처형하였다. 

  1312년, 교황 클레멘스 5세는 공식적으로 템플기사단을 해산시켰다. 이 사건은 템플기사단의 해체를 기도했으며, 그들의 재산은 다른 기사단이나 국가로 흩어지게 되었다. 

  

   스페인에서도 템플기사단은 성을 건설하고, 기독교 세력을 지원했다. 그들의 주요 임무는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스페인 땅을 되찾는 것이었기 때문에 스페인의 재정복운동(Reconquista)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스페인의 템플기사단도 14세기 초에 해산되었으며, 그들의 유산은 스페인의 역사와 문화에 큰  흔적을 남겼다.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 마을의 전설에 따르면 중세 시대에 ‘산 조일로’ 수도원은 종교 및 문화 중심지였으며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로 여행하는 순례자들에게 피난처를 제공했다. 중병에 걸려 죽음 직전인 소년 순례자의 이야기가 전설로 전해 오고 있다. 경건함과 의학적 지식으로 유명한 수도사들은 그를 구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지만 그의 상태는 계속 악화되었다. 어느 날 밤 수도사들이 신의 구원을 간절히 기도하던 중 성 조일로 자신이 젊은 순례자에게 환상으로 나타났다. 

   3세기에 순교하여 수도원의 수호성인으로 존경받았던 '성 조일로'는 소년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고 그의 이마를 만지고 사라졌다. 다음날 아침, 소년은 완전히 치유되어 깨어났고, 열이 내리고 힘은 회복되었다. 이 기적적인 치유는 성 조일로의 중재로 인한 것으로 여겨졌고, 이 이야기는 순례자와 마을 사람들 사이에 빠르게 확산되었다.

산소일로 성당

이 마을에 관한 또 다른 전설은 산타 마리아 델 카미노 교회와 관련이 있다. 기독교 세력이 무어인의 지배에서 스페인을 되찾기 위해 싸우던 레콩키스타 동안 무어 군인들이 교회를 모독하려고 시도했다. 그들이 교회에 들어가려고 하자 교회 안에 있던 성모 마리아상이 움직여 입구를 막아서 그들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두려움과 경외감에 사로잡힌 군인들은 그 자리에서 도망쳤다. 이 사건은 신의 보호 행위로 여겨졌고, 이 교회는 성모 마리아의 축복을 구하는 순례자들에게 존경받는 장소가 되었다.


♧ 레일 같은 노란 이정표를 따라서

 

      1987년 유럽 평의회는 산티아고 순례길을 첫 번째 ‘유럽 문화의 여정’으로 선포했다. 1993년 유네스코는 스페인의 ‘프랑스 길 ’을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 1998년에는 산티아고 순례길에 연결된 프랑스의 역사 유적지를 <세계문화유산>에 등재했다. 순례길의 이정표는 땅의 등대이고 기차 레일처럼 한 방향을 가리키고 있다. 순례자는 이정표가 가리키는 대로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가라면 가야 하는 카리스마가 넘치는 나침판이다. 아무리 길치라 해도 이정표를 놓치지 않고 따라가면 길을 잃지 않는다. 하지만 휴대폰을 보고 가거나 다른 생각을 하면서 걷거나 조금만 정신 줄을 놓으면 엉뚱한 길로 들어가 길을 잃고 고생하게 된다. 


순례자들에게는 나름대로 여정계획과 목표가 있다. 나는 하루 평균 25킬로미터 걸어서 33일 만에 완주를 하는 계획으로 하루 평균 대 여섯 시간 이상을 걸어서 백만보 이상을 걸어야 한다. 



  순례자들은 노란색 가리비와 500미터마다 나타나는 공식적인 이정표와 비공식적인 보조 이정표를 따라가야 한다. 이들 표시는 기차의 레일과 같아서 이정표대로 따라가는 것이 안전하고 편리하다. 그렇지 않으면 기차처럼 탈선하게 된다. 하지만 순례길 이정표는 약간씩 다른 모습으로 순례자를 안내한다. 이는 지방자치단체의 개성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순례자들은 150에서 300 미터마다 몽당 빗자루에 페인트를 묻혀 성의 없이 그려진, 어쩌면 못생기게 그려진 화살표이긴 하지만 방향을 잡는 데는 그만이다. 상형문자 같은 방향표시가 등대 역할을 하고 있어서 순례자들은 그것을 따라 순례하고 있다. 이정표의 노예들 같이 꼼짝 못 하고 이정표를 따라가야 한다.  신을 만나러 가는 길이기 때문에 한눈을 팔지 말아야 한다는 것인지 모르겠다.  만약에 도둑이나 강도들이 이전 노란 이정표를 임의로 그려서  순례자를 유인하면 꼼짝없이 털릴 것 같은 데 나만의 기우인지 모르겠다. 실제로 그런 일이 없지는 않았다 하니 유의해야 할 것이다.     



  이 노란색 화살표는 1984년 엘리아스 발리냐(Elías Valiña)라는 신부가 창안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화살표는 전봇대와 건물 벽에도 바위에도 아스팔트 땅바닥에도 그려져 있다.  마을지도와 알베르게 광고게시판에도 그려져 순례자의 편의를 도모하고 있다.               

   

   경로를 보여 주는 지도에서 갈림길에서 순례자가 갈 방향을 안내하고 있다. 갈림길에는 통상 <원래길>과 <대안길>이 있다.  <대안길>은 순례자의 안전을 고려하여 만든 길로써 원래길보다는 거리가 대체로 멀다. 대다수 순례길을 처음 걷는 순례자들은 짧고 편한 <원래길>을 택하고 두 번 이상 순례하는 사람은 <대안길>을 택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참고하기 바란다.        

 


<순례길 노란 화살표>


땅 위의 등대인가? 나침반인가?

카리스마가 넘치는 가이드인가? 

순례자들이여!

이정표가 시키는 대로 하시게나. 

이정표만 따라가면 길을 잃지 않으리

그게 산티아고가 내리신 길이라네. 

순례길을 걸으면 추억이 되고, 문화가 되며 걷는 자의 혁명이 되리라.   



#$@  이 글은 “19. 하늘 바다에서 구름이 항해하다.” https://brunch.co.kr/@96e291d8614c4ec/73 로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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