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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울메이트 Oct 23. 2024

『산티아고 순례길 인문기행』
 21. 신은 사랑이다.

 (제19일 차 / 베르시아노스델 레알 카미노~ 만시야 데 라스 뮬라스)

 라스 뮬러스)

♧ 오늘의 코스 


 오늘(10.13) 코스는 베르시아노스 델 레알 카미노(Bercianos del Real Camino)를 출발하여 ▷ 엘 부르고 라네로 (B Burgo Ranro) ▷ 렐리에고스(Reliegos) ▷ 만시야 데 라스 물라스(Mansila de las Mulas)까지 총 27km를 7시간 걸었더니 걸음 수는 4만 5천 보나 되었다.  N-120도로(속칭 로마길)과 평행으로 나 있는 평지 길을 걸었지만 자동차가 많이 다니지 않아서 위험하지는 않았다. 순례길은 이따금씩 고속도로 밑으로 난 터널을 지나기도 했다.    


♧ 카미노 순례자의 안식처


    중세 시대에 한 순례자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있었다. 그는 매우 경건한 사람이었으며, 순례길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었지만 신앙의 힘으로 이를 극복해 나갔다. 그가 베르시아노스 델 레알 카미노에 도착했을 때, 그는 매우 지쳐있어서 더 이상 걸을 수 없을 정도였다. 마을 주민들은 그를 따뜻하게 맞아주고 숙소와 음식을 제공했다. 그는 마을 사람들의 친절에 깊이 감사하며, 마을 교회에서 기도를 드렸다. 그가 기도하던 중, 교회 안에서 신비로운 빛이 비치더니 그의 피로가 사라지고 몸이 회복되는 기적이 일어났다. 이 사건 이후, 베르시아노스 델 레알 카미노는 순례자들 사이에서 신성한 장소로 인식되었다. 그는 마을을 떠나 만시야 데 라스 뮬라스에 도착했을 때, 또 한 번의 기적이 일어났다. 마을의 오래된 교회에서 기도를 드리던 중, 눈앞에 산티아고 사도(James the Apostle)가 나타났다. 사도는 그에게 축복을 내려주었고, 순례자는 큰 위안을 받았다. 

 

♣ God is Love!


   예루살렘에서 이곳까지 걸어서 왔다는 이스라엘 출신 여성 순례자가 고속도로 밑 다리 교각에다 준비해 온 페인트로 자기의 족적을 남기고 있었다. ‘God is Love!’라고 쓰고는 서명하였다. 저녁 식사하는 자리에 그녀를 만나 그녀의 종교관에 대해서 듣는 시간을 가졌다.  

나는 아직 신앙심이 없기 때문에 그녀의 설명을 경청하는 입장에 머물러야 했다.   

   

   "God is love"라는 구절은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특히 기독교 신앙에서 하느님의 본질과 그분의 속성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구절이다.  이 구절은 성경 요한일서 4장 8절에서 비롯되며, 하느님의 사랑을 중심으로 여러 신학적 의미를 담고 있다.  


   하느님은 사랑 자체이시며, 그분의 모든 행위와 계획은 사랑에 기반을 두고 있다.  "God is love"라는 말은 하느님의 본질적인 속성이 사랑임을 의미한다. 이는 하느님이 사랑의 근원이라는 의미로, 그분의 모든 행위와 속성이 사랑에 기반하고 있음을 뜻한다. 하느님의 사랑은 무조건적이고 변함이 없으며, 성 삼위일체 내에서의 사랑은 하느님의 본질적 특성을 대표한다. 


   기독교에서 하느님은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로 존재한다. 이 삼위일체의 상호 관계는 완벽하게 사랑과 일치하는 모델이다. 성부와 성자, 성령 사이의 사랑은 무한하고 영원하며, 이 사랑이 하느님의 본질을 형성한다. 하느님의 사랑은 모든 인류를 대상으로 하며, 무조건적이고 변함이 없다.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 창조하시고, 그들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한다. 이 사랑은 인종, 문화, 성별, 사회적 지위를 초월하여 모두에게 동일하게 적용된다.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의 가치를 확인하고, 그들의 삶에 목적과 의미를 부여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사랑은 구속적이며, 우리의 죄를 용서하는 희생적 사랑이다. 

  

   하느님의 사랑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하느님은 세상을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셨고,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희생하심으로써 하느님의 사랑을 완전하게 나타내셨다. 이 구속적 사랑은 하느님의 무한한 자비와 은혜가 녹아 있다.  하느님의 사랑을 본받아 우리도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야 한다.


   "God is love"라는 구절은 우리에게 도덕적 요구를 제시한다. 하느님이 사랑이시므로, 그분의 자녀로서 우리는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라"고 명령하셨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을 본받아 다른 사람들에게도 사랑을 베풀어야 함을 의미할 것이다. 


   톨스토이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서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은 타인을 사랑하는 것”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며, 우리 사회에서 점점 잃어가는 따뜻한 관계를 회복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웃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인간다운 삶이자 행복의 길이라고 한다. 


   그런데? 사랑은 기독교 윤리의 중심이자, 모든 행동의 기초가 된다면서 왜 기독교 국가 간에 전쟁을 일으켜 하느님의 아들들이 피를 흘리며 죽임을 당하는지, 사람마다 속이고 헐뜯는지 모르겠다고 내가 의문을 제기하자 그녀는 진지하게 대답했다. 


   신의 사랑을 믿는다고 해서 항상 인간이 그 이상을 실천하는 것은 아니다. 역사적으로,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요인들이 종교적 갈등을 부추겨 왔다. 사랑의 메시지가 인간의 불완전한 본성과 복잡한 사회적 요인들에 의해 제대로 실천되지 못하고 있다고 본다. 신의 사랑을 제대로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은 개인과 공동체의 지속적인 노력과 성찰이 필요하다. 


   내가 다시 "기독교를 국교로 하고 있는 나라가 적국의 양민을 학살하는 것은 신의  뜻에 어긋나는 행동이라고 생각하는데 당신의 생각은?"


   기독교의 핵심 교리 중 하나는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이다. 따라서 기독교를 국교로 삼는 나라가 양민을 학살하는 것은 분명히 신의 뜻에 어긋나는 행동이다. 이런 행동은 기독교의 사랑과 평화, 정의의 가르침과 정면으로 배치된다. 어떤 국가나 집단이 기독교를 명분으로 폭력과 학살을 저지르는 것은 종교적 교리를 왜곡하거나 정치적, 이기적 목적을 위해 남용하는 사례로 볼 수 있다. 이는 종교의 본질적인 가르침과는 무관하게, 인간의 불완전한 본성과 정치적 동기가 결합된 결과일 가능성이 크다. 종교적 가르침이 제대로 실천되지 않는 사례는 종교 그 자체보다는 이를 따르는 사람들의 행위와 결정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므로, 신의 뜻과는 별개로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한 정치지도자인 죄인들을 신이 용납하는 것은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반증이 아니냐고 그녀에게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흔들면서 웃으며 말했다. 


신은 항상 전쟁에서 승리자의 편을 드는 편향을 보이지만 그들의 잘잘못은 저승에서 최후의 심판으로 가름 할 것이다.       

 

  오래전에 읽었던 공지영 작가의 소설 『높고 푸른 사다리』의 스토리가 생각났다. 그 소설은 천주교 수도원에서 수행 중인 한 젊은 수사가 신부가 되기까지 사랑과 방황을 다루었다. 주인공 요한이 소희를 만나 운명적인 사랑을 나누며 신부의 길을 포기하려 한다. 


  서로 의지하던 젊은 동료들과 노 수사님의 죽음을 보면서, “고통은 왜 있는 것이며, 인간은 왜 존재하는지, 사랑은 무엇인지" 등에 대해 고뇌하며 성장해 나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작가는 사랑을 신의 다른 이름이자 우주의 다른 이름이라고 정의하고 있는데 그것은  "God is love"라는 말과 상통한다.


♣ 미국 산티아고 순례길 영화 " The Way"


   호텔에서 체크인하고 쉬는 시간에 산티아고 순례길을 소재로 한 미국영화를 보았다. 미국 캘리포니아의 한 골프장에서 안과 의사인 톰이 골프를 치고 있었다. 전화를 받는 표정이 매우 심각하다. 왜냐하면 자기 아들 다니엘이 산티아고 프랑스 길 피레네 산맥을 넘다가 조난을 당해서 사망했다는 전화를 받았기 때문이다. 

The Way의 광고와 한 장면 

   아들의 시신을 수습해 가라는 프랑스 생장 경찰서의 연락을 받는다. 톰은 황급하게 산티아고 프랑스길 출발지인 “생장 피드포르”기차역에 도착하여 경찰서를 찾아간다. 그곳에서 톰은 아들 다니엘의 시신을 확인하며 괴로워한다. 경찰은 톰에게 아들의 배낭을 건네주며 위로를 아끼지 않는다. 


   경찰관은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해 준다. 아들의 순례자 여권은 한 군데만 스탬프가 찍혀 있자 경찰관은 자기 순례자 여권에 찍힌 스탬프를 보여 주면서 72개의 이 빈칸을 거의 채우면 완주증을 발급받을 수 있다고 말한다. 


   배낭 속에는 몇 장의 지도와 헤드 플래시가 들어 있다. 톰은 배낭 속에서 아들의 앨범을 꺼내 열어 본다. 앨범에는 아들이 엄마랑 아빠랑, 여자 친구랑 함께 찍은 사진이 끼워져 있다. 톰은 경찰에게 아들의 시신을 화장해 줄 것을 부탁한다. 


   톰은 카페에서 네덜란드 청년을 만나서 순례길에 대한 장황한 설명을 듣는다.  그는 얼마 후에 결혼할 몸인데 옛날 양복을 입고 결혼식을 올리고 싶어서, 아내 될 사람을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해서 다이어트하려고 순례길을 걷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먹는 즐거움을 버리지 못한 것아 언제 옛날 정장을 입을지 모르겠다고 푸념한다.  


  화장한 아들의 시신이  뼛가루가 되어 상자에 담겨 아버지 톰에게 전달한다. 톰은 다니엘 대신에 순례길을 완주하기 위해서 아들의 배낭을 메고 혼자서 순례길에 오른다.  톰은 동행자 없이 피레네산맥을 터벅터벅 올라간다. 론세스바예스로 가는 이정표 앞에서 아들이 멈추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마침 나무막대기로 만든 십자가가 톰의 마음을 끌어 당겼다. 저 멀리 아들의 환상이 자기에게 손짓하며 언덕을 너머로 사라지고 있다. 톰은 이 십자가에 한 줌의 뼈 가루를 꺼내 뿌리고 기도를 올렸다. 


   이마에 헤드라이트를 켜고 알베르게를 내려왔을 때는 한 밤중이 되었다. 알베르게 침대에 올랐을 때 어제 만난 네덜란드 청년이 아는 체하며 순례길의 기후와 음식에 대하여 떠들지만 톰은 별로 흥미가 없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여권에 스탬프를 찍고 네덜란드 청년과 순례길 동반자가 된다. 아들이 머물렀을 성싶은 울타리에 뼛가루를 뿌리는 것을 보고 네덜란드의 청년은 톰에게 슬픈 사연이 있음을 짐작하게 했다.  톰과 네덜란드 청년은 숙소가 달라 헤어진다. 톰이 예약된 알베르게에 도착했을 때 다른 순례자들은 톰을 열렬하게 환영한다. 알베르게 손님들 틈에 아들의 모습이 보였다. 아들의 환상이다. 얼마나 아들의 죽음을 안타까운가? 

  

   이튿날 톰은 홀로 순례를 시작한다. 그는 다리를 건너다 그 난간에서 배낭을 벗으려다가 배낭을 강물에 빠트리고 만다. 겨우 건져냈지만 날이 어둑해져서 노숙을 하게 된다. 톰은 팜플로나(누적거리 70km) 성의  나폴레옹 문을 들어간다.  


   톰은 팜플로나 거리에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걷고 있는데 레스토랑에서 점심으로 양고기를 먹고 있는 네덜란드 청년이 만난다. 두 사람은 함께 포도주를 마신다. 순례길에서 쉬고 있던 사연 많은 캐나다 여인 ‘사라’는 담배를 끊으려고 순례길을 걷기로 했다면서 담배를 꺼내 입에 물고 불은 붙이지 못한다.  


  용서의 언덕을 지나고 순례길에서 톰은 대성당 소속 신부를 만난다. 어느 날 벌판에 있는 낟가리에서 톰의 길동무는 네덜란드 청년, 캐나다에서 온 사라, 아일랜드에서 온 소설가 재크 그리고 톰이 4인방이 된다. 아일랜드에서 온 소설가는 소재를 찾아서 순례길에 왔노라며 자기의 문학 세계에 대하여 넋두리를 늘어놓고 세 사람은 듣기만 한다. 


   작품 소재를 구하기 위해서 순례길을 걷고 있다는 소설가 “재크”와 톰을 비롯한 4인방은 시설이 후진 알베르게를 도망쳐 나온다. 톰 4인방은 늦은 밤에 숙소를 구하지 못해 노숙을 한다. 캐나다 여인이 톰을 치한으로 오해한 나머지 톰의 뺨을 갈기게 되자 분위기는 싸해진다. 이후 톰은 그녀에게 불쾌하게 대한다. 그녀는 톰에게 사과하지만 톰은 그녀의 사과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캐나다 여인은 강제로 추행당하고 임신해서 아이를 낙태한 죄책감으로 자기 귀에서는 가끔씩 아기 울음소리가 들린다고 털어놓는다. 

   

   길목의 카페에서 포도주 파티를 하는 자리에  톰은 끼고 싶지 않았지만 억지로 빠져든다.  술을 몇 잔 마신 톰은 소설가 자크와 네덜란드의 청년과 캐나다 여인을 비난하고 아들의 죽음 때문에 쌓인 스트레스 때문에 주정을 부리다 경찰에 연행되어 구금된다. 그 자리에서 톰을 바라보는 아들 다니엘의 시선을 환각으로 느낀다. 


   작가 자크가 신용카드로 톰의 벌금을 물어주고 그는 풀려난다. 그는 소설가에게 벌금을 대납한 데 대한 사과를 하고 길을 떠난다. 소설가 자크는 톰의 사연을 소설로 쓰겠다며 톰의 허락을 받아 내려고 노력하지만 톰은 개인 프라이버시를 내세워 동의하지 않는다. 


   부르고스(누적 293km)에 도착한 톰은 대성당의 신부와 재회하여 포옹하고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 배낭을 도둑맞는다. 작가는 이것도 소재라고 생각해서 메모를 열심히 한다. 배낭을 훔쳐간 집시 아버지가 마련한 파티에 초대받은 4인방은 집시들과 어울린다. 배낭을 훔친 아이를 자기 아들을 생각하며 용서하고 순례길을 떠난다. 


   다시 순례길을 정답게 걷는 톰의 4인방. 이제 알베르게에 투숙하는 것도, 식사하는 것도 자리를 같이 하는 일에 익숙해진다. 폰페라다(누적 578km)를 지나가는 4인방의 발걸음 가벼워지고 우정은 깊어만 간다. 소설가 자크가 톰의 사연을 소설로 출판하는데 동의를 받아낸다. 


   산티아고 대성당에서 4인방은 향로미사에 참석한다. 톰은 향로의 줄을 잡아당기고 있는 무리 속에 아들 다니엘이 끼어 있음을 환각 한다. 톰은 야고보의 무덤 앞까지 뼈가루 통을 가져간다. 순례자사무소에서 톰은 아들 이름으로 된 완주증 받고 감회에 젖는다. 4인방은 묵시아를 지나 스페인의 땅끝 마을 피니스테레로 간다. 톰은 남아 있던 다니엘의 뼛가루를 바다에 뿌리며 영화는 끝난다.  


   아들을 잃은 아버지의 심리를 보여 주며 죽은 아들과 살아있는 아버지의 화합을 그려내고 있다. 미구에 산티아고 프랑스길 예비 순례자들은 이 영화를 먼저 보고 순례길을 걷는다면 보다 큰 영적 성장을 기대할 것으로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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