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자의 공동체

우리는 타자를 어떻게 대해야 하는가?

by Hyun Lee
덴마크가 10년 안에 ‘한 지역에서 비서구권 주민이 30%를 넘지 않도록’ 제한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정책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코레 뒤브바드 베크 덴마크 내무부 장관이 성명을 통해 한 지역에 너무 많은 “비서구권 주민”이 거주하는 것은 “종교적이고 문화적인 ‘평행 사회’의 출현 위험을 증가시킨다”며 정책 추진 취지를 설명했다고 <아에프페>(AFP) 통신이 17일 보도했다. ‘평행 사회’는 이주자들이 사회 통합을 거부하고 자신들만의 폐쇄적 사회를 구축한다는 부정적 의미로 많이 쓰이는 용어다. 덴마크 정부는 관련 입법안을 조만간 의회에 제출할 예정이다. 덴마크 정부는 입법 과정에서 그동안 공식적으로 쓰던 ‘게토’라는 단어는 삭제하기로 했다. 게토는 과거 유대인 강제 거주 지역을 일컫는 말이어서 덴마크 내에서도 비판이 많기 때문이다. 뒤브바드 장관은 “게토라는 말이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있다”라고 말했다. 게토라는 단어 자체는 공식적으로는 없어지지만, 이번 정책은 덴마크 정부가 2018년 발표한 ‘평행 사회 없는 하나의 덴마크. 게토 없는 2030년’ 계획의 연장선이다.

덴마크 “‘비서구권 주민’ 한 지역에서 30% 못 넘는다” 한겨레 조기원 기자 2021-03-19


1. 공동체와 타자성

현대 공동체 철학의 중요한 쟁점은 전통적인 공동체 개념을 극복하고 배제된 타자성도 포함하는 새로운 공동성 개념을 정초 하는 것이다. 공동체에 대한 전통적인 이상은 타자성을 배제하고 모든 것을 동일성으로 끌어안는 것이다. 이때 새로운 공동체적 이상으로써 타자성울 포함하는 것은 다시 공동성으로 흡수한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여기서 공동성은 각 존재들의 특이성을 소멸시키지 않는 공동성, 타자성을 (보존하면서) 포함하는 공동성이다. 이를 위해서는 타자성에 새로운 지위를 부여해야 한다. 다원화와 세계화가 정점에 이른 상황 속에서 타자성의 완전한 배제는 불가능하며, 오히려 그것의 끝은 폭력과 또 다른 타자의 도래를 지속적으로 야기한다. 오늘날 난민을 포함한 이방인들, 경계인들은 동질성의 논리가 잡아먹어야 할 대상이 아니라, 동질성의 논리의 한계이자 그 결과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타자는 위계적 질서 내에서 우위를 차지하는 ‘주체’에 대응하는 개념이 아닌, 주체가 언제든 타자가 될 수 있는 상황 혹은 타자 간의 구분이 무위한 상황에서의 타자, 즉 주관과 객관, 너와 나, 주체와 객체라는 전통적인 이분법을 벗어난 타자이다. 이탈리아 철학자 로베르토 에스포지토에 따르면, 공동체를 뜻하는 라틴어 코뮤니타스(communitais)는 '함께'라는 뜻의 ‘쿰(cum)’과 ‘의무’를 뜻하는 ‘무누스(munus)’의 합성어이다. 어원적인 측면에서 공동체는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에 대한 근본적인 의무나 부채를 공유하기 때문에 함께 모인 사람들의 집단’을 의미한다. 그리고 무누스는 “반드시 주어야 하는, 주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주는 선물”이라는 “강렬한 의무의 성격”을 지녔다. 타자에 대한 주체의 의무가 강제성을 띠는 이유는 타자가 환대 hospes의 대상임과 동시에 적대 hostis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지그문트 바우만이 지적했듯이, 공동체 속에서 타자는 일종의 알려지지 않은 ‘변수(variable)’와 같은 존재이며, 내가 무엇을 하고 어떤 행동을 해야 할지 결정할 때 모든 계산의 공식에서 고려해야 할 대상이다. 그리고 변수로서의 타자는 위협적 요인으로 인식될 때 공포의 대상이 되며, 변수가 흥미를 자극할 때 매혹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2. 새로운 공동체에 대한 사유들

이런 맥락 속에서 장-뤽 낭시와 블랑쇼, 아감벤으로 이어지는 새로운 공동체 사유가 등장한다. 이를 위해 ‘공동체’라는 개념 자체를 해제하는 작업은 20세기부터 서구 지성사에 목격된다. 그 시작 중 하나가 조르주 바타유(1897-1962)이다. 바타유는 공산주의의 이념이 결국 스탈린주의와 같은 전체주의 사회로 변질하는 것을 목격한다. 그러면서 그는 ‘공동성 없는 공동체 communauté sans communauté’ 개념을 제시한다. 이 공동체는 자본주의적 생산과 소비가 아닌 포틀래치와 같은 증여적 소모를 목적으로 하는 공동체, 놀이와 정념을 위해 육체와 정신의 구분을 소모시키는 연인의 공동체, 혹은 희생제의를 통해 자신의 한계 너머로 나아가고자 하는 공동체들이다.


장-뤽 낭시는 바타유가 제시한 공동체를 비판적으로 받아들이면서 『무위의 공동체』를 1980년에 출판한다. 낭시는 바타유의 다소 비의적인 공동체론을 비판적으로 수용한다. 낭시의 공동체 이론의 핵심은 이후 나오는 모든 공동체 논의의 핵심으로 이어진다. 그것은 바로 공동체의 한계를 설정하는 비판적 공동체 이론이다. 여기서 비판(critique)은 칸트 때부터 한계와 경계 설정을 목적으로 두고 있다. 즉 낭시는 공동체 개념의 한계까지 도달해 보는 형이상학적 사유를 통해 공동체 자체의 의미를 해제하고, 공동체 자제에 대한 윤리적이고 정치적인 분석을 제시하려고 시도한다.


낭시는 공동체 개념을 구성하고 있는 ‘내재성’을 비판한다. 그에 따르면 공동체의 내재성은 동일성에 기원한 폭력적 구조를 지닌다. 이는 지라르의 비판과 유사한데, 공동체의 본질이 내재적으로 형성되는 순간 개체들 모두가 동일한 본질을 지녀야 한다는 이념이 발생하며, 반대로 어떤 개체의 속성이나 본질이 공동체의 본질이 되는 순간 공동체는 이 본질의 현실화를 위한 전체주의적 공동체가 된다. 즉 낭시는 절대적 내재성과 분열이 없는 절대적 진리를 통한 개체들의 통합은 파시즘의 폭력으로 귀결된다고 본다.


그렇다면 낭시는 이러한 동일성의 원리를 벗어난 공동체의 가능성을 보았을까? 낭시는 동일성에서 벗어난 공동체로 외존(ex-position)에 기반한 공동체를 제시한다. 외존은 관념과 이데올로기 이전의 존재론적 관계들, 즉 내가 그 자체로 타자에 노출(exposition)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외존을 통해 존재자는 어떠한 관념에도 포착되지 않은 ‘있음 그 자체’이며, 비동일적이며 우연성을 가진 존재들임을 드러낸다. 이를 통해 낭시는 이러한 단수적 존재자들이 ‘그저 있음’으로서의 공동체의 ‘무위 desœuvrement’를 강조한다. 낭시에 따르면, 공동체는 우리가 만들거나 목표로 삼아야 할 과제 œuvre가 아니라, 그 자체로 우리에게 주어진 조건이며, 그것을 현실 속에서 구현하려고 하는 행위 자체가 오히려 공동체의 본질을 훼손시킨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행위 대신 윤리적인 태도를 중시한다. 그가 말하는 무위의 공동체는 타자 중심의 윤리적 지평인 것이다.


모리스 블랑쇼는 이러한 무위의 공동체를 재해석한다. 그가 보기에 낭시의 사유의 바탕에는 사회주의 국가의 몰락 이후 어떤 공동체의 가능성을 탐색할 수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 담겨 있다고 본다. 그는 낭시의 무위의 공동체를 통해 고찰하며 ‘어떤 공동체도 이루지 못한 자들의 공동체’가 낭시의 무위의 공동체의 본질이라고 본다. 대표적으로 바타유가 주장한 연인들의 공동체는 마르크리트 뒤라스의 작품에서처럼 ‘밝힐 수 없는 공동체’로 문학의 공동체를 이룬다. 즉 블랑쇼는 낭시의 공동체를 현실과 문학을 통해 구체화한다. 그가 말하는 ‘밝힐 수 없는 공동체’는 침묵으로 남지 않지만, 언어화되기 어려운 어떤 관계들로 형성된 공동체에 대한 문학적 조명이다. 이러한 공동체는 『트리스탄과 이졸데』, 뒤라스의 『연인』 그리고 카프카의 『변신』에서도 출몰한다.


낭시는 2001년 블랑쇼의 이러한 해석에 대한 응답으로 『마주한 공동체』를 출판한다. 이전 저서 『무위의 공동체』에서 공동체의 형이상학적인 차원을 고찰했다면, 이번 저서에서 낭시는 도시, 시민성, 도시성과 같은 현실적인 사안들을 다루면서, 21세기에 파시즘과 같은 동일성을 기반한 폭력은 쇠퇴했지만, 초자본주의의 세계화와 더불어 거대한 경제적 불평등과 분열이 심화되었고, 세계 자본주의가 경제적 등가성만을 이념적 목표로 만들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주체의 동일성과 고유성에 대한 요구는 오히려 공동체의 틈을 벌리고 “세계는 더 이상 세계가 되기를, 또한 인간은 인간이 되기를 그만두고 있다”라고 비판한다. 그러면서 낭시는 인간이 ‘공동-내-존재’ 임을, 즉 인간의 존재론적인 조건으로서 ‘마주함’의 의미를 다시 사유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낭시에게 있어서 마주함은 어떤 주체의 절대적 힘과 절대적인 현전이 없이 타자와 마주하고 기대는 것을 의미하며, 어떤 목적을 위해 수단이 되지 않는 “마주한 공동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조르지오 아감벤은 여러 측면에서 유사점과 차이점을 드러낸다. 낭시와 블랑쇼가 자본주의와 개인주의 그리고 전체주의가 역설적으로 중첩된 당대 공동체에 대한 좌절과 극복을 위해 공동체 자체에 대한 개념을 해체하려고 했다면, 아감벤은 현존하는 공동체를 잠재성의 차원에서 철학적으로 재점검한다. 아감벤의 도래하는 공동체는 미래에 도래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현재 와 있으나 현실에 보이지 않는, 즉 잠재적으로 현존하는 공동체를 의미한다. 낭시와 블랑쇼가 내재적 공동체의 불가능성과 타자와 마주하는 단수적 존재 그 자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면, 아감벤은 특이성을 지닌 개체들이 어떠한 정체성으로 고정되지 않고 ‘무엇이든 존재’할 수 있는 자들의 공동체가 늘 새로운 공동체로 만들어질 잠재성을 지닌 ‘도래하는 공동체’에 집중한다. 즉 낭시와 블랑쇼가 타자에 대한 무위를 윤리적 근간으로 본다면, 아감벤은 무엇이든 될 수 있는 잠재성의 윤리를 말한다.


3. 정신분석과 공동체

정신분석은 늘 ‘개인’의 문제만 집중한다고 평가받지만, 그 개인은 진공 속이 아닌 공동체 속 개인이다. 이미 프로이트는 타자의 필연성에 대해 말한 바 있다. 인간은 생존과 안전을 위해 문명을 도입하지만, 그 문명이 다른 한편으로 인간을 억압한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사랑은 가족 공동체를 형성하는 토대이다. 그리고 인간은 이러한 가족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 다른 공동체들과 관계를 맺으면서 가족 공동체를 문명으로 발전시킨다. 그러나 문명은 사람들을 더 큰 단위로 통합시키기 위해 가족 간의 사랑을 단절시킨다. 이러한 단절은 근친상간의 금지, 최초의 법으로 명시화된다. 그래서 “문명은 사랑을 미묘한 제약으로 위협”하며, “사랑과 문명의 분리(Entzweiung)는 처음에는 개인이 속해 있는 가족과 그보다 더 큰 공동체 사이의 갈등이라는 형태”로 나타난다. 이러한 단절과 균열로 인해, 인간의 욕망은 다양한 방식으로 표출되는데, 그것들이 바로 도착, 죽음 충동과 같은 것들이다. 그래서 프로이트는 “문명인은 행복해질 가능성 일부를 희생하고, 그 대신 약간의 안전을 얻었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이러한 비극적 상황 속에 머물러야만 하는가? 프로이트의 말처럼, “가족은 개인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즉 인간은 문명의 보편화 작업 속에서 환원될 수 없는 개인의 영역을 항상 간직하고 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정신분석은 타자의 억압을 통해 오히려 개인이 완성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개인의 고유한 부분은 억압적 타자, 문명의 도입으로 생겨난 사회와 개인, 문명적 구조와 반구조 사이인 무의식의 주체로서 등장한다.


현대 공동체 담론과 정신분석이 서로 유사한 입장을 취하면서, 달라지는 부분은 바로 주체의 문제이다. 특히 공동체 이론의 관점에서 낭시와 자크 라캉의 관계는 미묘하다. 이 둘은 공동체를 어떤 완결성이 아닌 미완결성으로 본다는 점에서 유사하다. 즉 이 둘의 공통점은 공동체를 고정불변한 실체로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여기서 이 둘의 차이는 바로 공동체 논의 속 주체를 바라보는 관점이다. 낭시에게 주체는 내재성의 원리로 여겨진다. 그는 주체를 대체하는 개념으로서 단수성 개념을 제시한다. 공동체 속 개별존재는 단수적 존재인과 동시에 (모순적이게도) 복수적 존재 양태이다. 왜냐하면 공동체 속 개인은 고유한 시공간에 자리 잡는다는 점에서 단수적이지만, 시공간적 차이에 따라, 다른 존재자들과의 관계 속에서 다르게 전개되기에 복수성을 함의하고 있다.


반면 라캉은 타자와 늘 갈등하는 개인, 타자와 떨어질 수 없으면서 동시에 타자로 환원될 수 없는 무의식의 주체에 대해 말한다. 즉 낭시가 공동의 존재론적 필연성을 말하는 과정에서 주체와 타자라는 이항적 관계를 지우고 있다면, 라캉은 이항적 관계(최종적으로는 주체의 영역)를 유지하면서 공동의 문제를 다루고 있다. 라캉에게 있어서 주체와 타자의 관계가 유지될 수 있는 이유는 라캉의 주체가 존재론적 주체가 아닌 욕망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즉 능동적 주체의 공동체는 존재론적 차원에서 제시되는 것이 아니라 윤리적 차원에서 제시된다. 즉 라캉주의적 관점에서 공동체는 자신의 울타리를 해체하고 재구축하는 (능동적인) 욕망의 과정으로 이해된다.


만약 공동체에 대한 정신분석적 진단을 내린다면, 그것은 바로 갈등이 지닌 건강성, 분열에 대한 긍정을 회복하는 것이다. 현실 속에서 우리는 늘 타자와 갈등하면서 살아간다. 그리고 이 갈등은 우리를 괴롭힘과 동시에 우리를 구성하는 요소이기도 하다. 라캉적 관점에서 공동체를 본다는 것은 이 갈등을 마냥 부정적인 요소가 아닌 우리의 존재 조건이자 제대로 바라봐야 할 증상의 일부로 본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바타유가 말했던 동질성과 이질성의 진정한 소통일 것이다.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