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의 정념과 선문답

무지와 생성, 그리고 분석가의 사랑

by Hyun Lee
저는 이미 오래전에 무지가 불교에서는 하나의 정념(passion)으로 간주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한 바 있습니다. 이는 약간의 명상만으로도 충분히 정당화될 수 있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명상은 우리의 강점은 아니므로, 그걸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결국 (분석) 경험밖에 없습니다. dans je parle aux murs


불교에서 가장 뛰어난 것은 바로 선(zen)입니다. 그리고 선이라는 것은 이런 식입니다 — 당신이 무언가를 물으면, 돌아오는 대답이 개 짖는 소리 한 마디인 것이지요. dans le séminaire XX: Encore


라캉은 불교(특히 선불교)의 핵심을 사유 자체에 대한 포기(le renoncement à la pensée elle-même), 곧 의미(sens)의 포기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때 포기는 단순한 비사고가 아니라, 상징적 의미 체계 전체의 해체, 즉 무지의 수행적 채택에 해당한다.


분석가는 이러한 무지의 정념 - 상징계의 저항 혹은 사유의 저항 -을 분석의 도구로 삼는다.


라캉은 선문답의 구조와 분석 담론을 유사하게 본다. 선문답에서 선사는 의미를 가르치치 않으며, 무지를 통해서 제자의 사유를 해체시킨다. 이는 “알고 있다”는 환상을 해체하고, 무지로부터 출발하는 주체화 과정을 암시한다. 이때 사용되는 것이 바로 침묵(silence)이다.


선문답의 주요한 목적 중 하나는 의식 작용고착된 요소들을 포착하여 그 힘을 무력화시키는 데 있다. 이 목적을 적절히 수행하기 위하여 선사들은 문답 속에 일종의 함정, 구멍을 파놓는다. 가령 일반적인 문답에서는 일정한 질문의 한계 안에서 가능한 대답을 예상할 수 있다.


이때 기대 범위를 벗어난 답변을 받았을때, 보통 우리는 그 답변에 수긍하기 어렵다. 예를 들면 “부처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하여 “진리를 깨달은 사람”이라고 대답했다면 기대할 수 있는 범위 안에 있다고 할 것이다. 반면에 “부처란 무엇인가?”라는 동일한 질문에 대하여 “삼세근”이라 한 동산수초(洞山守初)의 말이나, “마른 똥막대기”라고 한 운문문언(雲門文偃)의 대답을 듣는다면 질문의 의도를 빗나간 것으로 생각하기 쉽다.


이들은 모범적인 해답을 주는 방식으로 대답하는 것이 아니라 거꾸로 해답을 추구하는 모든 길을 가로막는 언어를 구사하는 것이다. 즉 선사들은 ‘말 길[語路]’을 따라 판단을 결정하는 사람들의 사유 습관을 고의적으로 유도하여, 그 말이 가리키는 뜻을 잡도록 허용하고 결국은 포착할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상태로 몰아붙인다. 이것으로써 사람들이 미리 준비하고 있는 인식과 판단의 도구를 모조리 빼앗아 버리는 것이다. 이를 통해 제자는 기존의 관념을 화두를 통해 벗어나게 된다.


무지는 지식의 결여가 아니라 지식의 출발점이다. 라캉은 오늘날 과학 담론이 무지를 평가절하하지만, 사실 이 무지가 지식을 구축하고, 확립된 지식으로 만드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과거 추기경 니콜라 드 쿠자(Nicolas de Cues)는 가장 높은 수준의 지식을 ‘박식한 무지(ignorance docte)’라고 불렀다. 그런데 오늘날 정신의학은 무지를 하나의 미신(superstition)으로 축소시킨다.


분석 경험 속에서 무지는 기존의 분석주체의 담론을 재검토함으로써 새로운 담론, 즉 분석 담론을 형성한다.


라캉은 8번째 세미나 『전이』에서 플라톤의 향연에 등장하는 소크라테스의 발언을 인용하며, 아갈마(agalma)를 통해 결핍의 기표적 전달을 논의한다. 알키비아데스가 소크라테스를 욕망한 것은 알키비아데스 자기에서 비롯된 것 이 아니다. ‘소크라테스’라는 기표가 욕망하도록 만든 것이며, 이를 라캉은 사랑의 은유(metaphore de l’amour)라고 불렀다(SVIII/189).


알키비아데스의 입장에서 소크라테스는 욕망하게 만드는 내부에 있는 귀중한 것, 즉 아갈마(Agalma)를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는 인물이다(SVIII/183).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라캉은 소크라테스가 알키비아데스에게 “자네는 그저 아름답다고 여겨지는 것을 내놓고 대신 참으로 아름다운 것을 얻겠다고 시도하고 있는 것이며, 이는 참으로 ‘청동을 황금’과 맞바꾸겠다고 마음먹고 있는 것이네. 하지만 복 받은 자여, 내가 실은 아무것도 아닌 자인데 자네가 그걸 모르고 있는 건 아닐지 더 살펴보게(218d-219a)”라고 말하는 대목을 강조하며, 표면상으로는 소크라테스가 알키비아데스의 사랑을 받는 이처럼 보이지만, 실제로 사랑 받는 이는 알키비아데스라고 말한다(SVIII/189-192).


알키비아데스는 참으로 아름다운 것, 자신의 욕망을 소크라테스가 가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환상이다. 소크라테스는 이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한편으로 알키비아데스를 개도하기 위해 계속 참고 기다리면서 그 욕망을 더욱 불러일으킨다. 그리고 소크라테스는 그 욕망을 완전히 드러낸 이후, 욕망하는 대상의 허구성을 밝히고, 곧바로 알키비아데스로 하여금 자신을 더욱더 돌보게 한다. 이는 바로 사랑을 통한 역전이(contre-transfert), 전이애(transmour)가 일어난 것이다.


분석가의 사랑은 무지의 정념에 기반한다. 그래서 라캉은 “사랑은 자기가 갖지 않은 것을 그것을 원하지 않는 누군가에게 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자기가 갖지 않은 것"은 바로 "무지에 기반한 또 다른 지식"이다. 무지를 가진 자는 없는 것을 가진 자이다. 하지만 헤겔에 따르면 순수한 무는 단순한 없음이 아니라 즉시적인 존재와 동일한 수준에서 파악되는 순수한 규정의 운동성이다. 『대논리학』에 따르면, 순수한 존재와 순수한 무는 모두 즉자적으로 동일하며, 그 동일성은 생성(Werden)으로 나타난다. 순수한 무는 비어 있는 공백이 아니라, 존재와 서로를 밀어내고 다시 끌어오는 변증법적 진동의 한 극에 위치한다. 따라서 무는 어떠한 실체적 결여라기보다, 존재가 스스로를 출현시키는 자리로서의 역동적 가능성이다. 이 지점에서 라캉의 무지가 단순한 결핍이나 정보의 부재가 아닌 “또 하나의 지식”으로 구조화된다는 명제가 헤겔의 무 개념과 접속한다.


그리고 “원하지 않는 것”은 바로 저항의 지점, 즉 기존 상징계가 자기 동일성을 유지하기 위해 밀어내는 자리이다. 이 지점은 주체가 스스로의 기표적 일관성을 보존하기 위해 회피하는 자리이며, 상징적 동질성 안에 흡수되기를 거부하는 어떤 잉여의 자리이다. 주체는 이 지점에서 설명되지 않는 불편함, 해석불가능성, 말의 막힘을 경험한다. 라캉은 이 저항의 순간을 단순한 방어기제나 거부가 아니라, 상징계의 구조적 한계가 드러나는 분기점으로 보았다. 주체는 “원하지 않는 것”을 통해 자기 욕망의 실재적 핵과 마주한다.


분석가의 사랑이 이 “원하지 않는 것”에 준수하는 이유는 분석가가 바로 이 저항의 지점을 존중하며, 그 지점을 성급하게 상징화하거나 해석으로 봉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분석가는 주체가 회피하는 자리, 즉 기존의 지식과 욕망의 도식에 포섭되기를 거부하는 지점에서 멈추어 서는 법을 알고 있다. 분석가는 이 저항을 질병이나 오류가 아니라, 새로운 말이 생성될 수 있는 실재의 틈으로 다룬다. 다시 말해 분석가는 주체가 “원하지 않는 것”으로부터 도망치지 않도록, 그 자리를 비워둔 채 함께 버티는 자이다.


결국 “자기가 갖지 않은 것”과 “원하지 않는 것” 사이에는 하나의 동일한 구조가 놓여 있다. 그것은 상징계의 경계에서 나타나는 결여의 장소이며, 이 결여를 통해 생성의 운동이 시작된다.


따라서 분석가의 사랑은 대상적 충족을 약속하는 사랑이 아니라, 생성의 자리—즉 주체가 자기의 말 속에서 새로운 진리를 만들어내는 자리—를 열어주는 사랑이다. 사랑은 분석가가 “가지지 않은 것”, 곧 무의 자리를 건네주는 행위이며, 그 무를 건네받은 주체는 비로소 자기 안의 생성의 운동을 경험하게 된다. 분석가의 사랑은 주체가 이 생성의 운동 속으로 들어가도록 유도하는 선문답이자, 가장 근본적인 실천적 장치이다.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