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여의 결여

자본주의는 들뢰즈-니체를 어떻게 소비하는가?

by Hyun Lee

흔히 정신분석을, 특히 라캉에 대해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분들 중에서 어떤 부분에서 거부감이 있냐고 물어보면, 상당수가 “우리는 타자의 욕망을 욕망한다”라는 부분에서 마음에 안 든다고 말씀하신다.


저는 니체, 들뢰즈가 좋아요. 라캉은 결국 인간을 결핍된 존재로 보는 거잖아요. 인간에 무한한 긍정성을 보는 니체, 들뢰즈가 더욱 힘이 되고 용기를 얻는 거 같아요. 라캉을 보다 보면 결국 힘만 빠져요.


이때의 들뢰즈를 받아들이는 입장은 종종 지나치게 낙관적인 독해에 기반하며, 욕망을 언제나 흐르고 생성하며 스스로를 확장하는 힘으로만 이해하는 경향이 있다.


많은 독자들이 들뢰즈로부터 용기를 얻는다고 말할 때 그 힘은 종종 “모든 것이 생성하고 확장될 수 있다”는 감정적 위안에서 나온다. 반대로 라캉을 읽을 때 힘이 빠진다고 느끼는 이유는 결국 인간은 환상 속에 있음을, 결국 결여되어 있음을 강조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학적·임상적 관점에서 보자면, 이러한 정신분석적 지식의 불편함은 현실 구조에 대한 더 정밀한 분석의 도입이라는 신호이지, 인간을 약화시키려는 사유의 산물이 아니다.


들뢰즈적 긍정성은 매혹적이다. 생성, 흐름, 힘, 탈주라는 개념들은 주체를 묶어두는 것처럼 보이는 억압적 구조를 해방하는 정동적 효과를 제공한다. 하지만 우리의 욕망은 현실 속에서 실패를 마주할 수밖에 없다. 욕망이 왜 실패하는가, 왜 반복되는가, 왜 특정한 타자에 고착되는가, 왜 자신도 모르게 동일한 자리로 회귀하는가 하는 문제들을 들여다볼 수밖에 없다.


모든 이들의 욕망이 막힘 없이 발산되는 사회는 생겨날 수 있을까? 난 이러한 이미지들이 결국 우리에게 힘을 부여하는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결여라는 구조적 조건을 설명할 능력을 결여시키는 것이 아닐까? 바로 ‘결여의 결여’이다.


라캉이 결여를 이야기할 때, 이는 비관주의적 선언이 아니다. 결여는 인간을 축소하는 부정적 실체가 아니라, 욕망이 발생하는 형식적 조건이다. 결여가 있기 때문에 욕망이 생기고, 욕망이 있기 때문에 관계가 생기며, 관계가 있기 때문에 언어가 작동한다. 결여는 인간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생성의 조건을 제공한다. 오히려 욕망의 긍정성은 결여를 통과할 때에서만 성립한다.


나는 여기서 들뢰즈나 니체 철학 자체를 문제 삼으려는 것이 아니다. 들뢰즈와 니체의 사유는 인간의 창조적 잠재성과 세계의 다층적 배치를 사유할 수 있는 독창적 개념들을 제공한다. 문제는 들뢰즈-니체의 텍스트가 아니라, 들뢰즈-니체를 수용하는 방식, 특히 ‘긍정과 생성의 철학’이라는 이미지가 어떻게 소비되고 있는가라는 점이다. 오늘날 많은 독자들에게 들뢰즈-니체는 결여를 부정하고 힘을 긍정하는 철학자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이러한 독해는 들뢰즈-니체 사유의 섬세한 층위들을 거의 반영하지 않으며, 어떠한 심리적 기대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다.


나는 이러한 현상이 현대 자본주의와 깊이 연결되어 있다고 본다. 들뢰즈와 니체를 ‘긍정성의 철학자’로 소비하는 태도는 단순한 철학적 오해가 아니라, 현재의 사회적·경제적 환경 속에서 욕망이 조직되는 방식의 반영이 아닐까? 현대 자본주의는 결여를 인정하고 구조적 갈등을 사유하는 주체보다, 스스로를 무한히 확장하고 유연하게 재창조할 수 있다고 믿는 주체를 더 선호한다. 결여를 사유하는 것은 속도를 늦추고, 욕망의 고착을 인식하게 만들며, 자신의 한계와 구조적 제약을 마주하게 한다. 반면 “긍정만을 말하는 철학(실제 들뢰즈-니체가 정말 원치 않았겠지만)”은 자본주의적 주체에게 더 익숙하며, 더 소비하기 쉽고, 더 즉각적 효능감을 제공한다.


들뢰즈의 철학 자체는 자본주의에 대한 정교한 비판을 내포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소비되는 방식’이 신자유주의적 정동과 거의 완벽히 호환된다는 점이다. 독일의 철학자 페터 슬로터다이크(Peter Sloterdijk)는 들뢰즈-가타리의 리좀을 글로벌 자본주의의 미래를 ‘선취적으로’ 묘사한 철학적 장치라고 평가한다. 그는 들뢰즈와 가타리가 리좀을 통해 세계화된 하이퍼-프로레타리아트, 욕망·상품·의미의 흐름으로 구성된 글로벌 집합체를 이미 예견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모든 것이 연결된 사회는 곧 감시되는 사회가 될 수 있으며, 모든 흐름의 자유로움은 결국 신자유주의적 순환 구조와 맞닿아 있다. 그는 리좀은 더 이상 혁명적 상상력이 아니라,

글로벌 자본주의의 구조적 패턴이라고 말하면서, 이를 “리좀적 낭만주의”라고 명명한다.


‘욕망의 흐름’, ‘확장하는 힘’, ‘끊임없이 새로워지는 생성’이라는 표현들은, 오늘날의 자기 계발 담론이나 창의노동 담론, 혹은 플랫폼 자본주의가 요구하는 지속적 변형의 윤리와 자연스럽게 접속된다. 이러한 소비 방식은 결국 욕망의 구조적 조건을 사유할 기회를 삭제하고, 결여가 제공하는 비판적·변형적 기능을 무력화시킨다.

내가 생각하기에 라캉이 말하는 결여는 오히려 이러한 자본주의적 명령에 저항하는 몇 안 되는 개념 중 하나이다. 결여는 “더 해야 한다”는 초과 동원의 요구를 중단시키며, 욕망이 무엇을 향해 반복되는지, 주체가 어떤 구조적 위치에 서 있는지, 왜 동일한 패턴을 벗어나지 못하는지를 성찰하게 만든다.


즉, 결여는 주체를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적 긍정성의 강요로부터 주체를 분리시키는 최소한의 기호적 지점을 제공한다. 반대로 결여를 삭제한 긍정성은 자본주의의 속도와 강제적 유연성을 그대로 흡수하여, 비판적 성찰 대신 감정적 고양감을 남긴다.




금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