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긴밤의 동짓날

2024년 12월 21일 일기

by 한이

오늘은 1년 중 가장 밤이 긴 날이다. 겨울 내내 손꼽아 기다려온 날이기도 하다. 내일부터는 단 몇 분 씩이라도 낮이 길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북독에서 보내는 크리스마스가 5번이 다 되도록, 물기가 어려 채도가 낮은 북독의 겨울은 적응이 되지 않는다. 사실 이제는 눅눅한 추위의 회색 하늘이 익숙하면서도 적응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라는 것이 좀 더 정확한 설명일 것이다.


끝내주는 여름을 보내고 날씨가 흐려지기 시작하면서 생산력도 조금씩 떨어졌다. 한국에 살 땐 몰랐는데 나는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더라. 그래도 도서관 메이트들 덕분에 논문을 한창 쓰다가, 지독한 감기 탓에 얼렁뚱땅 자체 병가로 2주 정도를 쉬었다. 이제 나에게 병가는 그저 날린 날이 아니라 쉬어야 해서 쉬는 날이다.


그리고 그 병가 기간 중엔 그놈의 Kriegsrecht 속보가 뜨던 날도 포함이다. 단언컨대 10년이 지나도 2024년 12월 3일에 무슨 일이 있었고, 그 당시 나는 어땠는지 상세히 묘사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이 날의 기억은 마치 2014년 4월 16일의 기억 같기도 하다. 어쩌면 2022년 10월 29일의 기억과 비슷하다고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크리스마스가 당장 다음 주지만 어쩐지 하나도 설레지 않는다. 이것은 우울한 겨울 날씨 때문인지, 생산성이 떨어져 진도를 나가지 못하는 논문 때문인지, 하루가 멀다 하고 말도 안 되는 일들이 일어나는 내 나라 때문인지... 나는 정말로 알 수가 없다.


하루에도 몇 번씩 실망하고, 희망을 얻고, 분노하고, 벅차오른다. 그럼에도 계속 내 자리를 지켜야겠다고 다짐하는 것은, 나의 존재 자체가 가장 정치적인 맥락 위에 머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존재할 때 가장 정치적이다. 나의 생각과 말은 정치적인 맥락 위에서 완전하고, 그 맥락 안에서 가장 손상 없이 전달될 수 있다.


나는 요즘만큼 사람들의 선의와 정의에 대해 궁금했던 적이 없다. 그들의 꾸준한 마음은 어디서 기인하는 걸까? 기꺼이 앞장서고, 내주고, 나누는 실천은 어떤 마음으로 가능한 걸까? 질문을 한다면 내가 보기에 옳은 일을 하는 사람들에게 할 것이고, 답을 찾는다면 그 또한 그들에게서 찾을 것이다. 이해하지 않아도 되는 일에 내 관심을 뺏기고 싶지 않다.


언제나 그렇듯 시간은 꾸준하고 일상은 여전하다. 겨울이 지나면 봄이 온다며 요즘만큼 많은 사람들이 함께 같은 봄을 그리는 날도 없었던 것 같다. 긴긴밤을 지나 내일을 꿈꿀 수 있는 밤이 오기를, 이 긴긴밤이 내일을 위한 도약이 되기를, 그래서 이 밤이, 이 겨울이 주인공이 꼭 겪어야만 했던 시련쯤이면 좋겠다. 딱 견디어 성장할 수 있는 만큼의 예정된 시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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