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
이것은 뻔한 가족 영화지만 뻔하지 않습니다.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는 한국 가는 비행기 안이었는데, 영화에 한국어 자막이 제공되지 않아서 독일어 더빙과 영어 자막으로 봤던 것 같다. 정확히 기억이 안 나는 것은 그것 또한 벌써 1년 하고도 더 전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한국 가고 싶은데 갈 시간이 없으니 아직은 참을 만하지만 그래도 가고 싶다.) 영화를 보기 시작한 첫 몇 분만에 내가 잘못된 선택의 더빙과 자막으로 영화를 봤구나 깨달았다. 이번엔 이 영화를 OTT 서비스를 통해 접했기 때문에 원어와 한국어 자막으로 봤는데, 등장인물들이 중국어...로 추정되는 언어로 소통하는 것이 아닌가? (배우들 다 유명한 사람이라던데 잘 몰라서….) 영화 보다가, 할아버지가 조이에게 "너는 중국어를 점점 더 못하는구나" 하시길래 그들이 하는 말이 중국어임을 확실히 알았다. 대사뿐만 아니라 자막을 통해서도 언어가 다르다는 걸 눈치챌 수 있었는데, 중국어 대사와 영어 대사가 서로 다른 색으로 표시되었기 때문이다. 쓰면서 생각해 보니 비행기에서 봤을 때도 영어 자막이지만 일반 글씨체(영어)와 기울임체(중국어)로 번갈아서 표현되었던 것 같긴 하다. 그렇지만 확실히 말이라는 것은 보는 것보다 듣는 것이 더 와닿는구나 생각했다. 특히나, 독일살이 벌써 6년 차, 독일어 없는 대화가 드문 요즘 나의 일상을 그들의 일상을 비교해 보았을 때 말이다. 남들이 보기엔 저런 느낌이겠군, 했다. 1년 반 만에 영화를 대하는 태도가 달라진 것을 보니, 모르는 새 뭐라도 쌓였구나 싶고. 아무튼 처음 이 영화를 봤을 때보다 인물들의 삶이 훨씬 나와 가깝게 느꼈다는 감상을 구구절절 해 보았다.
그렇다면 개봉한 지 3년이나 지난 이 영화의 감상문을 써야겠다고 다짐한 이유는 무엇일까? 첫번째는 최근에 내가 뭐라도 써야겠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이고, 두번째는 기록하지 않으면 남지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러니까, 남는 것은 기록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영화를 기록하기보다 영화를 보고 든 생각, 모든 감상문이 그렇겠지만, 영화를 보고 난 후의 나의 감상을 남기고 싶었다. 영화를 보던 나의 기분, 영화를 본 나의 하루, 하루를 포함해 그맘때의 나를 기록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남겨두면 언젠가 미래의 내가, 혹은 다른 유니버스의 내가 우연히 발견하고 재밌어할지도 모르겠다. 다른 누구보다 내가 나의 글을 제일 재밌게 읽으니까.
지금부터는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으니, 읽으시는 분들이 계시다면 참고를 부탁드립니다.
그래서 INTJ인 내가 처음으로 감정이 북받쳤을 때가 언제냐면... 처음으로 울컥한 장면이 어떤 건지는 벌써 까먹었지만, 인상 깊었던 장면 두 가지가 생각이 난다. 어떤 게 먼저 나온 장면인지는 기억하지 못한다. 어쩔 수 없다. 기억력이 좋지 않기도 하고, 에에올 같은 뒤죽박죽 된 순서의 영화는 더더욱 앞뒤 장면을 외우기 쉽지 않다. 그래서 인상깊었던 첫번째 장면은, 에블린 돌멩이가 기꺼이 굴러 떨어지던 장면. 사실 이 장면은 어떻게 에블린과 조이의 갈등이 해결될지 암시하는 장면이었다고도 생각한다. 좁혀지지 않을 것만 같은 둘의 거리를 좁히는 건 결국, 에블린이 아니라 조이 어머니께서 해결하셨으니까요. 어머니는 위대하죠. 그런데 과연 그게 이 영화를 보고 난 감상이 될 수 있을까? 그러고 싶지 않은 마음이 불쑥불쑥 든다.
이 영화를 보면서 은은하게 궁금한 게 있는데, 이 영화 보던 백인인 딸들도 조이를 보면서 공감을 했을까? 굳이 백인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그렇다고 백인 대신 미국인이라고 하자니, 중국어보다 영어가 편한 조이가 미국인이 아니라고 할 수 있나? 싶어서. 물론 내가 조이에게 공감한 것은 조이가 미국에서 태어나 영어를 사용하기 때문이 아니라, 비슷한 정도로 보수적인 동북아시아인 부모를 두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내가 공감한 그 포인트는, 과연 조이가 중국인 부모의 딸이기 때문인가? 끝도 없는 질문들이 이어진다. 질문을 꺼내놓고 곱씹으면서 생각해 보니, 나는 내 경험을 바탕으로 조이를 보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나의 경험을 투영한 조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을 뿐이다. 나의 유니버스에서 조이는 보수적인 중국인 부모를 둔 딸로 이미 납작해져 있었던 것 같다. 이 영화는 그 이상을 이야기하고 싶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마 다른 유니버스에서는 조이의 다른 모습에 대해 이야기할지도 모르겠다. 바쁜 엄마를 둔 조이, 중국어로 소통하는 조이, 동성연인을 가족에게 소개하는 조이... 그 외에도 내가 발견하지 못한 조이가 수도 없이 많겠지. 아무튼 내가 만난 조이는 참 거울치료에 능통했어서, 엄마한테 미안하면서도, 엄마도 그런 딸이었겠거니 하면서도, 아무튼 그랬다.
다시 조이 어머니 이야기로 돌아가서 어머니는 위대하다로 끝내고 싶지 않은 이유를 생각해 봤다. 이건 아직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은 내 기억 중 하나인데, 얼마나 인상깊었으면 그때 내가 몇 살이었는지도 기억이 난다. 내가 9살 때의 일이다. 엄마랑 나랑 내 방 침대에서 누워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동생은 유치원생이었을 텐데 뭐 하고 있었길래 단 둘이 있었는지 그것까진 기억이 나지 않는다. 엄마랑 같이 일상적인 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엄마한테 그런 얘기를 했다. "엄마는, ㅇㅇ(엄마 이름)라고 불렸어?" 그런데 갑자기 엄마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엄마 이름을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했다. 내 딴엔 변명을 한다고, "아니, 엄마 어렸을 때 말이야. 할아버지가 ㅇㅇ(아/야)~ 하고 부르지 않았어?" 그랬는데. 갑자기 엄마가 울기 시작한 것이다. 너무 당황스러워서 그냥 엄마한테 미안하다고 하고 다시는 엄마를 이름으로 부르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엄마가 운 이유는 아직도 알 수 없지만, 에블린이 조이한테 더 이상 자길 에블린이라고 부르지 말라고, 나는 네 엄마라고 얘기하는데 이 기억이 다시금 떠올랐다. (놀랍지만 아직까지도) 독일 문화를 잘 알지는 못하지만, 여기서도 엄마는 엄마라고 부르지, 엄마 이름을 부르지는 않는 것 같다. 근데 그게 예의를 갖추기 위한 것인지, 이름보다 엄마라는 호칭이 더 가까워서인지는 모르겠다. 그러니까 나의 정서는 조이보다는 에블린에게 가까울 것 같지만서도, 에블린은 조이한테나 엄마지 다른 사람한테까지 엄마여야 하는가? 하는 의문인 것 같다. 영화에서 보여준 에블린의 삶을 '엄마'라는 단어로 가두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 그게 얼마나 무거운 말인지, 아직 엄마가 되어보지는 않았지만 알 것만 같아서. 아무튼 저의 문화권에서는 그랬다는 이야기입니다. 계속 이렇게 핑계를 대게 되네.
그럼 두번째 인상 깊었던 장면은 무엇이었나. 에블린이 세탁소 유리창을 깨고 결박당한 채 정신을 차렸을 때 에블린의 시야를 공유한 장면. 웨이먼드가 디어드리에게 뭔가를 이야기하고, 에블린은 '저 바보 같은 (이라고 하지 않았지만) 남정네가 또 쓸데없는 짓한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정도의 생각이었겠지만. 그 카오스 (사실 카타스트로페Katastrophe가 먼저 떠올랐다) 속에서 갑자기 1주일이나 마감일을 연기해 주었을 때. 되게 바보 같고, 손해 보는 것 같고, 별거 아닌 것 같지만 그게 상황을 바꿀 수도 있다는 걸 얘기할 때. 각각의 유니버스의 웨이먼드가 몇 번이나 되풀이해서 에블린에게, 그리고 화면 너머의 나에게 말해줄 때, 그냥 참 위로가 되었던 것 같다. 지는 게 이기는 거란 말을, 머리로는 알겠는데 마음은 그게 아니라서 참 어려웠던 적이 많았는데 말이다.
세무조사 받으러 세무서 가는데 세무사한테 줄 쿠키를 챙겨가는 웨이먼드의 마음은 무엇일까. 우릴 좀 잘 봐 달라는 뇌물 같기도 하고, 그렇다면 정정당당하지 못한 방법을 쓰는 것만 같고.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어떤 분은 비자청에 갈 때 작은 과자라도 사간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게 뇌물로 보일지, 순수한 선물로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괜히 깊게 생각하지 말고 나도 챙겨가 볼까 싶다. 사실 중요한 건 과자가 아니라 그 사람이랑 이야기해보겠다는 열려있는 마음일 테니까. 솔직히 비자청 벌써 몇 번이나 다녀왔고, 나의 체류를 결정하는 공무원들도 친절한 사람, 불퉁한 사람, 좀 이상한 사람, 그냥 좋은 사람 다 만나 봤지만. 그냥 희망을 좀 더 걸어 보고 싶어졌다. 안 되면 어쩔 수 없고의 마음으로... 쉽지는 않겠지만.
영화를 끝까지 보고 나서 웨이먼드의 마음으로 디어드리를 본 후에, 편견을 확실히 풀었기 때문에 적을 수 있는 거지만. 솔직히 디어드리가 첫번째 빌런으로 나왔을 때, 해외 살이하는, 말하자면 '외국인'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왜 저 사람이 빌런인지 이해했을 듯하다. 에블린이 중국인한테만 각박하게 구는 것 같다는 대사를 하는데, 그 순간 얼마나 찔렸는지. 대체 내가 너희 나라에서 뭘 잘못했는데, 나한테 비자를 주니, 못 주니, 돈을 더 가져와라... 아무튼 그랬다. 디어트리(를 포함한, 외국인을 상대하는 모든 공무원들)도 디어트리의 유니버스가 있겠지. 소시지 손 유니버스처럼 어떤 유니버스에서는 내가 그 사람이랑 죽고 못 사는 사이일 수도 있잖아. 하지만 그 유니버스에서는 그놈의 베암터(Beamter, 공무원)가 대머리는 아니었음 해.
이 영화에 대한 감상문이 한두 개가 아닐 테고, 감상은 그보다도 많을 텐데, 언젠가 SNS에서 이 인물들이 은유하는 정신질환이 있을 것이라는 글을 본 것 같다. 에블린은 다중인격장애, 그럼 조이는 우울증이려나 싶었다. 에블린이 ADHD 일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이 너무 많아서 마치 다른 세계에 있는 것처럼 공상에 빠져버리는 건 아닐까. 내가 감히 진단은 할 수 없겠지만서도, 어디 하나 아픈 데 없이 완벽한 사람이 존재는 할까 싶기도 하다. 까만 베이글은 우울처럼 보이기도 했고, 허무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베이글을 비관적인 삶의 태도로 치환하고, 웨이먼드가 보여주는 순수한 마음을 대비하기 위해 둘을 동일선상에 두자니 그건 또 너무 뻔한 이야기가 되는 것 같다. 그치만 사실 뻔한 이야기를 이렇게 풀었기 때문에 뻔하지 않아지는 것 같기도.
마지막으로 한 장면만 더 얘기하고 싶은데, 유명한 연예인이 된 유니버스 속 뒷골목에서 만난 에블린과 웨이먼드의 대화 장면이다. 나 어쩌면 망(한)사(랑)를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이 영화는 인물의 감정과 그들의 관계를 유니버스마다 다른 상황과 행동으로 보여준다고 느꼈다. 연예인 유니버스에서는 에블린이 웨이먼드에게 키스를 함으로써, 오리지널(?) 유니버스에서는 에블린이 이혼서류에 사인을 함으로써, 그리고 에블린이 웨이먼드를 유리조각으로 찌름으로써, 에블린이 웨이먼드에게 상처를 주었다. 드레스 입은 에블린과 슈트를 차려입은 웨이먼드가 언쟁을 펼치는 장면을 볼 때는 관객의 입장에서 별 생각이 없었는데, 그런 에블린의 모습이 그 유니버스의 웨이먼드에게는 이혼서류에 서명하는 아내를 보는 것만큼, 그리고 유리조각으로 찔린 것만큼 아팠다는 것을 장면이 몇 차례 지나간 후에야 직관적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나 어쩌면 정말 망사랑을 좋아하는지도 모르겠다. MBTI 신봉자는 아니지만, INTJ는 사람인 척하는 로봇이라잖아요. 뚝딱이에게도 제법 와닿는 사랑이야기였달까.
그중에 가장 인상 깊었던 대사는, "다른 세계에서라도 나는 당신이랑 살고 싶어, 세탁소 운영하고, 세금도 내면서." (정확하지는 않다.) 라며 에블린을 두고 떠나던 웨이먼드의 마지막 한 마디였다. 에블린은 연예인이 된 유니버스에 도달했을 때, 오리지널 유니버스를 버리고 그 유니버스에서 살고 싶어 했다. 마치 오리지널 유니버스 속 에블린은 지긋지긋하다는 듯 취급하면서 말이다. 웨이먼드를 따라가지 않았더라면, 아빠가 나를 붙잡아 줬더라면, 연예인이 되어 화려한 삶을 살 수도 있었을 텐데. 근데 오히려 그 유니버스의 웨이먼드는 에블린이 처음 시작한 유니버스 속 웨이먼드, 에블린과 결혼해서 세탁소를 꾸리며 살고 있는 웨이먼드를 부러워하고 있었다. 정말 뻔한 클리셰인데, 그게 웨이먼드의 망사랑으로 표현되면서 인상 깊게 남은 것 같다. 그렇다고 순수한 사랑은 모든 걸 해결한다! 이건 아니고, 세상 누군가는 나를 이렇게나 사랑해! 남편 최고, 결혼 최고! 이것도 아니고, 모든 건 상대적이니까 현재에 만족하며 살자! 이것도 아닌 것 같다. 다시 한번 제목을 떠올려 본다. 모든 것이, 모든 곳에서, 한꺼번에.
모든 것이, 모든 곳에서, 한꺼번에. 그제야 버스 점프에 대해 설명해 주던 (아마도) 알파 웨이먼드의 말이 떠올랐다. 모든 유니버스는 크고 작은 결정들을 통해서 생겨났고, 현재 유니버스의 나는 그동안 내가 선택한 것과 선택하지 않은 것들을 통해 정해진 결괏값인 것이다. 여기에 더해서, 어떤 유니버스의 에블린들보다 뛰어나지 못한 에블린이기 때문에 살아남을 수 있었고 모든 에블린이 될 수 있다고. 다른 유니버스에서는 좀 더 멋진 삶을 살아낸 또 다른 나를 위로삼아 현재의 삶에 만족하자는 것은 아니다. 차라리 현재 주어진 것은 모두 내 선택으로 비롯된 것이니 정신 차려라...라는 쪽이 더 가까울 것 같다. 덧붙여 내가 무슨 선택을 했더라도, 내가 느끼는 것은 모두 동일했을 것이라는, 범인간적 차원의 이해도 필요하다. 조부 투파키가 에블린을 찾은 이유는 조부 투파키이자 조이였던 스스로가 본 것과 동일한 것을 볼 수 있는 사람이 에블린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고, 그 이유로 조부 투파키는 조이가 느낀 것을 자기도 느끼기 때문이라고 얘기하니까. 투박하게 얘기하면 사람 사는 거 다 똑같다는 말이지 않을까. 그렇다고 매사 회의적으로 그래서 뭐 하려고? 이런 끝도 없는 땅굴 파는 허무주의적 태도보다는, 쿠키도 구워 주고, 파티도 열고 그렇게 같이 사는 게 좋겠다는 메시지를 이렇게나 다이내믹하게 표현한 것 같다. 사실 이게 참 어렵다. 그러고 보면, 에블린의 첫 버스 점프 트리거는 디어트리에게 사랑한다고 고백하는 것이었다. 예수님이 원수를 사랑하라 그러셨는데, 우선 세무서 직원 정도는 사랑해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래, 비자청 베암터부터.
최근에 개인적으로 힘들었어서 어제도 일기를 쓰고 잤는데, 일기에 쓴 말이 이것이었다. "나라도 나를 사랑해 줘야지. 나는 내가 사랑해야지." 웨이먼드가 에블린에게, 이 세계에서는 당신과 내가 결혼하지 못했지만 다른 세계에서라도 당신과 살고 싶다고 이야기하는데 그건 사랑이잖아. 에블린이 깨버린 유리창의 파편들을 묵묵히 치우는 거, 죽어가면서도 에블린의 활약을 지켜봐 왔다고 고백하는 거, 그것도 사랑이잖아. 다른 사람도 유니버스를 초월해서 이렇게나 나를 사랑해, 갖가지의 모습으로 나에게 사랑을 이야기해. 순간 에블린에게 이입한 나는, 남도 나를 저렇게 사랑하는데, 나는 왜 나를 사랑하지 못할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관객인 나는 버스 점프를 하지 못해서 지금 유니버스의 나와는 다른 선택을 했을 나의 삶이 어떤지 알 수 없지만, 내가 느끼고 생각하는 것은 동일할 것이라는 메시지가 이제야 나를 사랑해야 하는 수많은 이유 중 하나가 되는 것 같다.
선택하지 않았기 때문에 선택할 기회가 남았다는 게 참 희망적으로 느껴졌다. 아직도 도전해 볼 수 있는 일이 많이 있다고 생각하면 너무 낙관적인 걸까? 그래도 사랑하자, 나를. 너를. 모든 것을, 모든 곳에서, 한꺼번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