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성애 없는 상담사의 공동육아 이야기 #1.
아이의 울음소리가 멈추질 않는다.
벌써 2시간째다. 자정을 넘어가고 있다. 지친다. 도대체 이유라도 알고 싶다.
‘넌 왜 우니? 나보고 뭘 어쩌라는 거니? 나도 울고 싶다’ 안아도 보고 젖도 물려보고 자장가도 불러 보았다. 아이는 잦아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급기야 생후 한 달도 안 된 아이에게 윽박지르고 있는 내가 보인다. 머리로는 이건 아니지 하면서도 몸은 벌써 아이를 밀쳐내고 있다. 내가 죽을 것 같다.
결국 아이를 놓고 소리를 지르며 거실로 나왔다. 건넛방에 자고 있던 남편이 결국 아이를 안아 든다. 이미 남편도 퇴근 후 아이와 씨름을 한 후였다. 웬만하면 내 선에서 해결하고 싶었는데... 자책과 무력감에 더 화가 났다. 얼마가 지났을까. 아이도 지쳤는지 잠이 들었다. 지친 남편이 내게 얘기한다.
“모성애가 없는 거 아니야. 애가 우는데 화를 내면 어떡해.”
그렇다. 난 모성애가 없는 엄마다. 그걸 아이 낳고 알았다. 남편의 그 말이 너무 서운하고 화가 났지만 반박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진짜 내가 모성애가 없을까 봐 두려웠다. 어쩌지 아이를 다시 뱃속에 넣을 수도 없고...
30대 초반 남편을 만나기 전까지 결혼도 아이도 생각이 없었다. 20대 공부하며 복지사로 학교에서 청소년 만나며 상담하는 일이 좋았다. 내가 십 대였던 시절 공부가 전부인 학교는 창살 없는 감옥 같았다. 한창 방황하며 들꽃처럼 자유로워야 할 시기에 벼의 못자리처럼 열 맞춰 앉아 하루를 보내는 아이들이 안쓰러웠. 특히 어디에서도 주목받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마음이 갔다. 그렇게 난 우울했던 내 십 대를 그렇게 돌보고 싶었던 것 같다. 그런 내가 어쩌다 모성애가 없는 엄마가 되었을까?
여기서 잠깐 오해는 풀고 가야겠다.
국어사전에는 모성애란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본능적 사랑이라고 명시되어 있다. 결국, 모성애는 타고난다는 얘기다. 그래서 이 단어가 엄마들에게는 뼈아프다. 마치 모성애가 없으면 엄마가 아니라는 뜻 아닌가. 엄마가 될 자격이 없는데 어떻게 아이를 낳았을까. 나도 분명 열 달 아이를 뱃속에서 내 모든 것을 아낌없이 나눠주고 분신처럼 키웠다. 아이가 사랑스럽다. 그러면서 부담스럽다. 아니 때론 너무 벗어나고 싶다.
프랑스의 철학자 엘리자베트 바댕테르는 <만들어진 모성(L’Amour en plus)>에서 ‘모성애란 본래부터 당연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진 것’이라고 주장했다고 한다. “모성애란 하나의 감정에 지나지 않으며, 그렇기 때문에 모성애라는 감정은 본질적으로 우발적일 수밖에 없다.”라는 것이다.
그렇다. 모성은 능력이나 재능이 아니라. 감정이다. 정서는 상호관계 속에서 만들어지는 것 아니던가. 감정은 무엇보다 변화무쌍하며 유동적이다. 아이가 미치도록 사랑스럽다가도 정나미가 뚝 떨어진다. 솔직히 버려버리고 싶을 때가 있다. 뉴스에 간혹 나오는 모성애 없는 엄마들의 미친 짓 난 이해한다. 그런 마음이 들었다는 것만으로 이미 난 유죄다. 혼자 감옥에 수십 번 다녀와도 죄책감은 사라지지 않는다.
왜? 난 엄마니까. 그리고 나약한 인간이니까.
이쯤에서 고백해야겠다. 상담사가 되는 것보다 엄마가 되는 게 더 어려웠다. 지금도 엄마고 앞으로도 엄마이지만 결코 엄마로서 유능해지진 못 할 것 같다. 물론 연차가 될수록 요령도 늘고 훨씬 수월해지는 건 사실이다. 그것도 아이들이 커 가면서 엄마를 이해해주기에 가능하다. 아이들이 날 가르치고 있다. 많이 배운다. 사춘기를 앞둔 아이들이니 앞으로 더 많이 배울 것 같다. 아이들이 있는 한 엄마에겐 졸업은 없지 않은가. 수업료가 꽤 비싸긴 하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다.
엄마는 태어나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만들어진다. 엄마 되기를 포기하지 않는 것.
그게 내겐 '모성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