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어딘가로 멀리 떠나고 싶다 하면, 도와줄래?
새벽이다. 오지 않았으면 했던 지독한 시간이 또 찾아왔다. 마음이 휩쓸려 버리기 전에 잠으로 도망치면 그만이지만 그다지 잠이 오지도 않는다. 겁을 먹고 달아난 건지, 아니면 느릿한 걸음으로 오는 건지. 20년이 넘도록 이 몸을 보고 마음을 들여다보며 살아왔지만 도무지 갈피가 잡히지 않는다.
어떻게든 눈을 감고 있어 봤는데, 아직까지는 올 기미가 보이지 않아서 켜켜이 쌓인 생각이나 정리하기 위해 노트북 앞에 앉았다.
이곳에 발을 들이면 푸념을 먼저 뱉는 것 같아 무섭다. 이런 걸 좋아하는 사람은 사실 아무도 없을 텐데. 그걸 알면서도 그냥 이것저것 섞어 내놓는다. 맛없는 음료를 내놓고 사람이 오기만을 기다리는 주인이 된 것 같아서 씁쓸하다. 내가 마셔도 맛없는 걸.
생각이 내려준 줄을 타고 올라가다 급기야는 '태생부터가 음울한 사람은 아니었을까?'라는 질문마저 던지게 되어버렸다. 개인적으로 상당히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질문이지만, 침대 위에 앉아 가만히 생각에 잠기고 있다 보니 그런 것에도 손을 대게 되었다. 이런 질문에 훅 빠져드는 순간 '난 원래 이랬어.' 하며 변화의 가능성마저 완전히 차단해 버릴지도 모르는데. 지나치게 빠져들지 않도록 뒤에서 팔을 잡아끌어 거리를 벌렸다. 눈으로만 관찰하도록.
남은 백지를 바라보다가, 멀리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죽고 싶은 건 아니고, 머리를 좀 비우고 싶다는 뜻.
'내가 어떻게 도와줄까?'
그런 질문을 혼자 던져보았다.
'가만히 있는 게 도와주는 거야.' 하고 퉁명스럽게 답하려다가, 여태껏 가만히 있어서 해결된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깨닫고는 조금 슬퍼졌다.
마음 안의 작은 논쟁에서 져버린 나는 하고 싶었던 것들을 생각해 보았다.
그럼 날 좀 데려다 줄래?
아무도 신경 안 써도 되는 곳으로.
진짜 별 거 아니야. 그냥 밥 한 끼 같이 먹자고. 눈앞에 뭔가 있으면 좀 조용해질 것 같아서.
싫으면 어쩔 수 없지만.
이걸 보면, 너는 승낙을 해주려나 어쩌려나.
지금은 끄덕여도 날이 밝으면 귀찮아하려나?
그래도 너 살리자고 이러는데 좀 봐주라.
내가 생각해도 참 민감하고 골치 아픈 성격.
자꾸만 이것저것 신경 쓰느라 건강까지 다 깎아먹으며 살고 있으니 말이다.
앞에 있는 상대의 상태를 관찰하며 가장 맞는 형태로 탈바꿈하는 것이 습관이니, 편안했던 적도 그다지 많지 않고 피로감이 금방 몰려오는 것도 사실.
이것저것 섞이다 보니 가끔은 어떤 것이 진짜 나였는지도 잊어버리고 만다.
성향이 맞는 사람을 만나면 그래도 편안함을 느끼지만, 세상 사람들이 전부 다 나와 같으리란 법은 없으니까.
어떤 것이 진짜 나인지 아직도 헷갈리지만, 이제는 색을 잃어버리는 것보다 찾아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알고 있다.
내일은 정말 어디라도 데려가서 밥 한 끼라도 먹이고 와야지.
억지로 맞추지 않아도 주변과 잘 어우러질 수 있게.
나다울 수 있었던 기억으로 한 주를 잘 버텨낼 수 있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