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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걸음, 나의 길

by 이지원

"여러분, 이제 2월 하순이네요."

개강이 코앞까지 다가온 날.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목소리가 다정하게 머릿속을 깨워주었다.


별로 놀라운 일도 아니고, 오지 말라고 생떼를 부려도 막을 수 없다는 걸 알기에 덤덤하게 받아들였다. 앞에 놓인 일로 투정을 부리기에는 이제 기력이 없다. 나쁘지 않았던 기분을 땅끝까지 끌어내리고 싶지도 않으니 그저 오늘을 살아내기로 했다. 식사를 마치고 집안을 정리하며 하루를 보내다 저녁때가 되어서야 한 가지 생각이 찾아왔다.



꿈과는 너무나도 거리가 먼 전공. 원하는 것을 확실히 밀어붙이지도 못한 채로 그저 등 떠밀리듯이 고른 것. 부모님은 몸이 불편한 딸이 좀 더 쾌적한 환경에서 일을 하길 바라셨나 보다. 썩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래도 그게 아니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다고 생각했었다. 내가 정말로 매력을 느끼는 분야는 안정적인 수입과도 거리가 멀었고, 성공을 만나기도 쉽지 않았으니까.

그림도, 글도, "취미로만 즐겨."라는 말에 눌려 서랍 안에 갇히고 말았다. 애초에 직업으로도 갖지 못할 것이 뻔하니 누군가에게 보여주자는 생각도 하지 않고 살았다.


전공이 무조건 취업의 길이 되지 않는다는 건 알고 있었다. 진로 변경을 법적으로 막아둔 것도 아니고, 결국은 선택에 따른 거니까. 그렇지만 전공의 커리큘럼을 따라가다 보니 어쩐지 정말 그쪽으로 가야 할 것만 같았다. 학교에서 전해주는 취업 정보도 전공에 따라 달라졌으니 말이다. 아직 세상에 보이지도 못한 종이뭉치가 마음 안에 불어닥친 바람 속에서 파르르 떨리고 있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무엇이라도 해보고 싶었다. 이대로 떠밀리며 살다간 정말 아무것도 못해본 채로 허망하게 죽을 것만 같아 두려웠다. 똑똑히 귀에 들려오는 나의 목소리를 억누르면 결국 후회만 남을 것 같았다. 꼭 직업으로 이어지지 않더라도 일단 해보자. 온전히 나의 마음에 이끌려보자. 나만의 것을 쌓아보자.


브런치스토리에서 승인을 받고 한 편씩 글을 써 내려가는 것은 새로운 행복을 가져다주었다. 당장 멋진 결과물이 눈에 보이지 않더라도 좋았다. 쌓아나가는 과정마저도 즐거움이었다. 세상에, 과정이 즐거운 일이 있다니. 누가 시키지 않아도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니.

텅 비어 있던 마음속에 뜨거운 활력이 끓어올랐다. 바람을 따라 정처 없이 떠돌던 나의 세상은 이제 떠돌이 생활을 멈추고 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가끔 불안이 어깨를 타고 올라오긴 하지만, 하루 이틀 정도 잘 보듬다 보면 새벽 공기에 섞여 창밖으로 날아간다.


나만의 색이 점점 선명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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