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을 감싸고 있던 번데기의 껍질이 스스로 갈라질 때가 왔다.
이번 주말이면 어깨를 짓누르는 짐가방들을 트렁크에 싣고서 학교로 돌아간다. 변두리에 위치한, 집에서 멀리 떨어진 학교로.
학과에서는 이제 슬슬 진로를 정해보라고, 걱정 어린 말씨로 채근했다. 다만 줄기가 비실했던 나는 문장 비슷한 것마저도 말하지 못하고 입안에서 우물거리며 둘러댔다. 영혼도 없이 원하지 않는 것을 이야기하며 거짓말을 하고 싶지 않았다. 그것이 얼마나 속을 뒤집는지,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2학년이 끝나갈 무렵에서야 나는 마음의 껍데기를 벗길 수 있었다. 교수님, 저 글을 쓰고 싶어요. 정말로, 오래전부터. 그냥 쭉— 이렇게, 글을 쓰며 살고 싶어요.
나직하게 뱉은 말은 연구실에 작은 파장을 일으켰다. 잘게 조각난 줄무늬가 새겨진 천장에서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먹장구름 하나가, 그 하얀 천장의 정가운데에 단단히 박혀 있었다. 톡, 떨어진 물방울이 삽시간에 장대비가 되어 어깨와 목과 얼굴에 꽂혔다.
그것을 직격으로 맞은 교수님은 아주 잠깐의 침묵을 유지했다. 보통의 학생들이 말하는 길과는 사뭇 달랐기 때문일 거라고, 나는 마음속으로 짐작했다. 나의 선언을 들은 교수님들은 모두 비슷한 표정이었다. 마치 머리 안에서 거대한 종이 울린 것만 같은 표정. 천장과 바닥, 하얀 벽면을 달리던 둔중한 소리가 나의 귀에도 흘러왔다. 목덜미가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목구멍을 조인 채로 참아왔던 말을 내뱉은 것에 모종의 후련함마저 느꼈다. 소리 없이 숨을 내쉬고서는 침묵의 끝에 이어질 답을 기다렸다.
아, 하고 터져 나온 작은 감탄사가 침묵을 갈랐다. 그런 것을 좋아하는구나.
아주 의외라는 듯이, 놀라움이 묻어 나오는 목소리. 전혀 몰랐다며 웃음을 지어 보이는 교수님의 앞에서 나도 어색하게나마 입꼬리를 올려 웃음을 지었다. 살포시 고개를 끄덕이며.
내가 마주했던 그 얇은 웃음들은, 얼마간 허공을 돌다 산산이 부서져 같은 곳으로 흘러내렸다.
그런데, 그것만 하며 살기엔 너무 불안정하지 않니?
그러한 염려에 반기를 들 생각은 하지 않았다. 내가 생각하기에도 그랬으니까. 여러 번 이야기했듯이, 노트북 앞에 앉아 글을 쓰는 것만으로 먹고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읽어야만 일말의 가능성이 간신히 눈을 뜰 수 있었으니까.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인 만큼, 길목은 좁았다. 단단한 갈비뼈를 짓누를 정도로.
그러니 글 외에도 살아갈 수단을 찾기 위해 구인 구직 어플을 들락거렸다. 서투르게 이력서의 뼈대를 잡고, 채용 공고를 확인하고, 무엇이 나와 맞을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내 전공에 가장 알맞은 업무는 사무직이었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부터 역류해 입속으로 퍼지는 만류를 무시할 수 없었다. 혹자는 철이 없다고, 나중에 가서 마음을 고쳐먹으면 늦을 것이라고 혀를 내두르겠지만, 적어도 지금의 나는 그런 말들을 다 묻어버릴 정도로 큰 고함을 지르고 있었다. 바짝바짝 말라 갈라진 목소리로.
1월에서 2월을 건너는 동안 몇 건의 솔깃한 제안이 들어왔지만, 이제 봄이 오면 학교로 돌아가야 할 학생이었으므로 거절을 할 수밖에 없었다.
내가 지금, 뭘 위해서 이렇게 몸부림치고 있지?
그러한 의문을 떠올린 것은 불과 3일 전이었다.
급할 것도 없었다. 아직은 채우지 못한 것이 많았으니까. 학점도 아직 다 채우지 못했고, 그 흔한 컴퓨터 자격증마저도 준비하지 못했다. 마음만 앞서 달려가 봐야 좋을 것은 없었다. 뱃속에서부터 구물구물 올라오는 그 흥분을, 상기된 볼을 찬물이 묻은 손으로 감싸 가라앉히고 술렁이는 머릿속을 헤집어 보았다.
단지 넓은 곳으로 가고 싶었다.
맞지 않는 옷을 입었기에 움직임이 더 갑갑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전율이 없는 활동만을 하다 보니 마음이 지쳐갔던 것일지도. 그렇지만 이미 택해 들어온 길이고, 덜컥 큰일을 결정해 이곳저곳을 뒤흔들어 놓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니 졸업 전까지 조금만, 조금만 더 참아 보자며 스스로의 허리를 끌어안고 엉킨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무엇보다 나는 모든 것을 그만두었던 적이 있는 사람이었으니까. 중학생도, 고등학생도 아닌, 그저 한 명의 청소년으로 살았던 적이 있는 사람이니까.
그 당시에 느꼈던 무력감을 거두고 한 번의 기회를 더 얻고 싶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하여간 모든 것을 다 떠안고 이끌어야만 하는 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어느 곳에 가더라도 그런 역할은 맡게 되겠지만, 단지 그 안에 내가 사랑하는 것이 녹아들어 있길 바랐다.
파득파득 소리를 내며 튀던 불꽃이, 어느 순간 커다란 화염이 되었던 것일지도.
곧 등에 붙게 될 '3학년'이라는 견출지에, 마음이 크게 동요되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여전히 뜨겁게 달궈지기만 한, 그러나 쓰일 곳은 그다지 없을 작은 돌.
그렇게 나를 정의하고서 팔과 다리를 끈끈하게 묶어두었던 긴장을 풀었다.
떠날 준비는 끝나지 않았지만, 적어도 더 이상 같은 자리에 머물러 있지는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