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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을

by 이지원

그 여름에, 난간에 앉아있던 여인을 보았다.

그래, 동쪽의 문을 열고 날아올라 오래 떠 있다가, 군청색 하늘에 안겨 서쪽으로 돌아가는 여인.


더운 날 늦은 오후에 창문을 열어젖힌 채로 후덥지근한 공기를 맞고 서 있으면, 미끄러지듯이 춤을 추는 그녀가 나타났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모습으로 나타나서는 아파트의 난간 위에 발끝만을 올려두고 아슬아슬한 춤을 추었다. 손안에 땀이 차오를 정도로 아찔한 춤을.


발이 닿고 손이 향한 곳에는 붉은 꽃이 피었다. 이름조차도 알지 못하는 크고 작은 꽃들이, 고목처럼 단단히 땅에 박힌 아파트의 벽을 비추고 하늘을 수놓았다. 꽃잎이 춤추는 듯 유려한 움직임을 따라 나부끼는 머리카락은 어느 순간 노랗게 빛났다가, 그 자그마한 꽃처럼 붉게 타오르기도 했고, 눈을 아프게 찌를 정도로 찬란한 빛을 내다 종내는 보랏빛으로 물들었다.


나무에서부터 울려 퍼지는 매미의 구애를 배경음악 삼아, 그녀는 느릿한 움직임으로 주위를 밝혔다. 처음 몇 번은 공중에 무언가를 그리는 듯, 섬세하게 손끝을 움직였다. 길지 않은 손톱, 약간의 구릿빛이 도는 피부. 좁은 난간 위에서도 겁에 질린 기색을 보이지 않고 거침없이 몸을 움직였다. 넓은 땅 위에서 움직이듯이.


물감을 묻힌 붓으로 그린 듯 유연한 곡선이 생겨났다. 땅밑으로 곤두박질 칠 것처럼, 이쪽을 마주 보고 허리를 뒤로 젖히기도 했다. 나는 말리려 했지만 내 말이 그녀의 귀에 들릴 리가 없었다. 아니, 나의 말은 그녀에게 닿을 수 없을 것이 분명했다.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것이 아니었다. 단지 말의 방법이, 삶을 이어가는 방식이 다를 뿐이다. 어쩌면 그녀의 아찔한 곡예는, 어떤 위험한 행위가 아닌 평범한 행위였을 것이다. 본래, 아주 처음 세상에 났을 때부터 그리 살았을 것이다.


그것을 알고 나서는 잠자코 그녀의 춤을 지켜보았다. 부드러운 목덜미에 피어난 해의 꽃이 찬란하게 빛났다. 굵고 가는 줄기가 어지럽게 몸에 얽혀 있었다. 미세하게 위아래로 움직이며 새로운 공기를 몸에 퍼뜨리던 가슴 언저리에도, 적당히 근육이 붙어 탄탄한 팔과 어깨에도.


허리의 선이 흐르며, 그 끝에서 꽃잎과 줄기가 그녀의 몸을 감싸듯 얽히고 풀려나가기를 반복했다. 이제는 사람이 아닌 하나의 식물이 바람을 타고 흔들리는 것만 같았다. 늦은 오후의 강렬한 해를 품은, 그 색으로 빛나는, 본 적도 들은 적도 없는 화려한 식물이 후덥지근한 공기 속에 살아 움직이고 있었다.


동쪽의 문이 잠기고 서쪽의 문이 활짝 열릴 즈음에, 그녀는 하늘거리던 움직임을 멈추고 코앞까지 다가와 처음으로 나의 눈을 응시했다. 더운 공기가 훅 끼쳤다가, 얼마 가지 않아 퍼석하게 식었다. 그녀의 상체를 감쌌던 꽃과 덩굴이 마치 잠에 빠지듯 몸을 웅크렸다. 그러나 그녀의 눈에는 아쉬움도 슬픔도 떠돌고 있지 않았다.


나는 이제 서서히 군청색으로 물드는 그녀의 눈을, 그 안에서 똑같이 군청색으로 물드는 나의 모습을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하늘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미동도 없었던 그녀의 입술이, 살며시 다가와서는 이마에 살짝 닿았다 떨어졌다.

주변의 모든 소리가 멀어지고 오직 그 온기만이 머물렀다. 그녀는 고요히 물러나며, 돌아오지 않을 선물을 이마에 남기고 식어가는 하늘에 안겨 사라졌다.



조금 서늘한 저녁 바람이 불어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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