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잘 살고 있어?

끝맺음을 잊은 채로 서랍 안에 잠들어 있던, 1월 22일의 글.

by 이지원

어떻게든 살아있긴 하다.


얼마나 남았는지 모를 건강도 수명도 있는 대로 깎아가면서 이름 석 자가 남아있는 자리에 가만히 서 있는 것이 낯설게 느껴진다. 앞으로 몇 밤을 더 보내야 바닥이 날지는 잘 모르겠다.


잠을 좀 자고 싶은데, 홀로 있으면 어딘가에서 지금 잠들어선 안 된다고 어깨를 흔들어 깨우는 것만 같다. 내가 눈을 뜨고 지켜보고 있으면 내일이 안 올 것만 같다.

그리고 이 또한 헛된 기대라는 걸 알고 있다.


몸을 일으키는 것이 부쩍 힘들어졌다. 누가 끌고 나가면 밖으로 나갈 수는 있지만, 자력으로 현관문을 여는 것이 어려울 뿐이다. 해가 지는지 뜨는지도 모른 채로 살다 미뤄뒀던 잠을 몰아서 자고 나면 어느샌가 다음날이 찾아와 등을 밀어낸다. 감각이 아주 희미해졌다.


오밤중에 전등불을 끄는 것이 무서워 계속 켜고 있다. 오래전에는 전등불을 꺼도 그리 불안하지 않았는데 최근에는 불을 끌 때마다 불안이 찾아온다. 수면 시간이 말도 안 되게 늦는 것은 아마 이런 습관 때문일 것이다.


머리 안쪽 어딘가가 아주 흐려진다.

살집이 붙어 있던 신경이 자꾸만 여윈다. 피골이 상접한 몰골. 그런 모습으로 정신이 굶주려 있겠지. 무엇으로 채워야 할지 모르겠어. 어떻게든 채워뒀던 것으로 버티고 나면 또 밤이 찾아와. 입술을 비집고 새어 나온 말로 나를 어르고 간지럽히고 웃게 만들어. 열린 눈, 흐리게 남은 기억. 그걸 자꾸 더듬다가 날이 밝아온다. 멍하니, 백색 커튼 사이로 새어 나온 여린 햇살을 맞이하고 나서야 눈을 감는다.



언젠가는 악몽을 꾸었다. 찢어질 듯한 소리. 애원하는 말. 누가 빌었는지 알 수 없다. 귓구멍에 꽂혔던 비명이 희미한 울음으로 잦아들었다. 물속에 있는 것처럼, 먹먹하고 축축한 목소리. 그런데 나는 내 팔 안에 가두어진 사람이, 내 가슴 밑에 누운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가 없어서, 그냥 영문도 모르고 얼빠진 소리를 낼 뿐이었다.

나일까, 내가 알던 누군가일까. 그렇지만 귓가에 찾아온 목소리가 전혀 달라. 가족도, 친구도, 나도 아니야. 어디서도 본 적 없던 여자.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없는 말. 벌겋게 부은 왼쪽 뺨. 제멋대로 헝클어진 검은 머리카락. 희미하게 피부가 비칠 정도로 얇고 하얀 원피스.


여자의 얼굴은 눈물로 더럽혀져 있었다. 화장이 번져 눈물이 흐르는 곳마다 새카만 선이 그려졌다. 잔뜩 일그러진 얼굴. 그 모습에 아연함을 삼킬 수가 없었다.


이 순간에 대하여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으니 자초지종을 물을 작정이었다. 그러나 입을 벌리고 말을 뱉어내려는 순간, 다른 무언가가 그것을 입안으로 욱여넣었다. 부르르 떨리는 손. 무언가를 쥐고 있는 듯, 관절이 아파올 정도로 힘껏 구부린 손가락. 눈에 보이지도 않는 무언가가 그것을 들어 올리고 뒤로 내빼었다. 깨닫지 못한 사이에, 어딘가로 향하려는 듯이.


그리고 완전히 백지가 되었던 머릿속에, 단 한 가지의 목적지가 스쳐 지나갔다.


막아야 해.


일순간에 스쳐 지나간 그 생각이 어딘가에 잡아먹히기 전에, 완전히 흐려져 기억의 뒤안길로 사라지기 전에, 이 끔찍한 순간을 멈춰야 했다.


나는 억눌렀던 숨을 토해내며 반대편 손으로 주먹을 잡아 눌렀다. 향할 곳을 잃은 끔찍한 무기는 한참을 바르르 떨며 씨름하기 시작했다. 저릿한 통증이 서릴 정도로 꽉 다문 입술 사이로 가늘게 신음이 흘러나왔다.


얼마간 실랑이가 이어지다 두 손이 툭, 늘어졌다.

왜 그런 모습을 보이고 있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내가 그런 사람이었나? 이 여자가 나에게 해를 끼쳤을 리도 없을 터였다. 전후 사정을 알지 못하지만, 우선 겁을 먹은 채로 팔을 버둥거리는 여자를 진정시키기 위해 여자의 왼편으로 비켜나려 했다. 그러나 나의 몸은 딱 붙어버린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았다. 몇 번이나 몸을 들어 올리려 했지만 헛수고였다.


어쩔 줄 모르고 있던 그 순간에, 눈이 아플 정도로 파란 빛이 얼굴 한쪽을 뒤덮어 돌아보니 커다란 텔레비전이 켜져 있었다.

그 맞은편에서는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입을 틀어막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저 하얗게 얼굴이 질린 사람도 있었고, 울음을 터뜨리는 아이의 목소리도 들렸다.

여러 개의 눈이 어둠 속에서 빛났다.


지지직거리는, 신경을 북북 긁어내는 듯한 소리에 숨이 막혀오기 시작했고 그렇게 꿈에서 깨어났다.

등과 이부자리가 축축하게 젖은 것을 느끼며 몸을 일으켰다.



그 여자를 다시 만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적어도, 그 기이한 공간에서는 벗어났길.

그녀도, 그곳의 나도.





keyword
작가의 이전글나를 찾는 페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