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채식주의자>: 진정한 해방은 무엇이었을까?

by 이지원

기분 전환을 위해 찾았던 서점에서, 나는 이 책과 만났다.


부끄럽지만, 새로운 책을 읽은 것이 참 오랜만이었다. 오로지 귀찮다는 이유만으로 외출을 등한시했었기 때문이었다. 서점에 발걸음을 하지 않은 지도 오래되었으니 새로운 책이 쌓이지 않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새로운 책을 읽지 않으니 생각이 좀처럼 돌아가지 않았다. 책 속에 파묻히다 머리를 들었을 때의 그 상쾌한 느낌을 다시 한번 느껴보고 싶었다. 한여름에 시원한 얼음물을 마신 것처럼, 뒷골이 서늘한 그 느낌. 온몸의 열기가 엉거주춤하게 뒷걸음질을 하던 그 순간을.



색색의 표지로 덮인 누군가의 세상 속에서 고민하다, 오렌지빛 네온사인이 반짝이는 베스트셀러 코너로 발걸음을 옮겼다.

부드러운 조명에 안긴 채로 반짝이던 한 권의 책이 보였다.


<채식주의자>.


담백하면서도 강렬한 제목이었다. 최근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셨던 한강 작가님의 책. 푸르른 저 표지를 열면, 그 안에서는 어떤 세상이 그려질까. 저 안에 들어가면 내가 어떤 생각을 품게 될까. 나는 홀린 듯이 책을 집어 들고, 선 채로 몇 페이지를 넘겨 가며 읽었다.


강렬하게 빨아들이는 듯한 문체에, 나른하면서도 담담한 그 분위기에 빠져들었다. 그 자리에 두고 나올 수가 없었다. 어쩐지 그 자리에 놓고 나오는 순간, 저 뒷부분을 알 수 없을 것만 같다는 두려움마저 느껴졌다. 나에게는 그만큼 신선하고 독특한 충격을 안겨주는 책이었다. 그 이야기 안에 직접 들어가 살펴보고 싶었다.



사흘에 걸쳐 책을 모두 읽었다. 잠시 내려놓고 싶었던 부분도 있었지만, 그러한 흔들림 속에서도 한편으로는 강한 끌림을 느꼈다. 한 페이지를 넘기면서 나름의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이 이후부터는 책에 대한 스포일러가 존재하므로, 혹시나 직접 읽어서 내용을 파악하고 싶으신 분께서는 주의해 주시길 바란다.




*








언젠가부터 고기를 거부하게 된 '영혜'. 이를 걱정한 가족들이 어째서 고기를 먹지 않느냐고 물으면, '꿈을 꾸었다'는 말로 대답을 대신한다. 기다란 대막대에 매달린 고기의 형상, 피웅덩이에 비친 자신의 얼굴, 누군가를 죽이는 자신을 보았다고. 그리고 겨우 꿈 따위로 고기를 거부하는 영혜를 가족들은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녀의 부모도, 남편도, 누구도.


영혜는 열여덟 살까지 아버지에게 종아리를 맞으며 자랐다. 집에서 키우던 개가 자신의 다리를 물었다는 이유로 아버지의 오토바이에 묶여 달리다 죽는 모습도 보았다. 그 개가 그날 저녁 보신탕이 되어 밥상 위에 올랐을 때, 그것을 전부 먹기도 했다. 나으려면 먹어야 한다는 말을 듣고서.


아무렇지 않게, 표를 내지 않고 살았지만 영혜의 마음속에는 그런 모습들이 내려가지 못한 채로 응어리가 되어 남아 있었을 것이다. 폭력에 대한 반감이, 그리고 그 속에서 살았던 자신에 대한 반감이. 그러니 결국 어떠한 생명을 죽여 얻는 고기에도 거부감을 갖게 되지 않았을까.


영혜는 나무가 되고 싶어 했다. 그 누구에게도 피해를 주지 않는 나무가 되길 바랐다.

처음에 육식만을 거부하던 그녀는 끝내 채소와 과일을 포함한 모든 먹을 것을 거부하게 된다. 그녀에게 있어, 인간의 모습을 한 자신의 몸은 영혼을 붙잡는 껍데기에 불과했다. 죽음으로 이루어진, 죽음으로 유지할 수 있는 껍데기. 그 몸으로부터 하루빨리 해방되는 것이 그녀의 소원이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작품의 후반부까지 남아 그녀를 보살피던 것은 언니 '인혜'였다. 그러나 그녀마저도 영혜의 내면을 전부 이해하지는 못한다. 그녀는 그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영혜를 보살피려 했지만, 영혜가 바라는 것은 그 육체로부터의 '해방'이지, 인간의 모습을 한 육체를 살리고 그 안에서 생명을 이어나가는 것이 아니었다. 아마도 영혜에게는 언니를 비롯한 가족들의 염려가, 떨리는 손길과 목소리가, 전부 날카로운 칼과 같이 보였을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영혜를 구원할 수 있었을까. 단 한 사람만이라도 그녀의 말을 들어주었더라면, 그랬더라면 그녀를 바꿀 수 있었을까? 그러나 영혜에게 구원이란 것은 더 이상 의미가 없었다. 누군가의 죽음으로 유지할 수 있는 몸으로 살아가느니 차라리 죽어 없어지는 것이 나을 것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의 이해가 있었어도, 그녀가 맞을 결말은 그리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이마저도 다분히 개인적인 생각이 녹아 있을 뿐이지만, 작중에서 그녀가 보여줬던 완고한 저항을 생각하면 오직 들어주는 것만으로 되돌리기에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어떠한 폭력이 마음 안에 깊게 새겨지고, 아물지 못한 상처가 이곳저곳에 번진 그 순간부터 돌아갈 수 없는 숲에 발을 디딘 것이 아닐까.


영혜를 주변의 소중한 사람이라 생각하고 작품을 다시 읽어 보면, 그녀의 모습을 지켜보는 입장에서는 마냥 평정을 유지하는 것이 힘들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여위어 가는 사랑하는 사람을, 내가 알던 곳에서 멀어지는 사람을 달리 손도 쓰지 못한 채로 바라보고만 있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리고 내가 손을 뻗으려 하면 할수록 더욱 큰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람을, 어떻게 해야 자유롭게 할 수 있을까. 읽으면 읽을수록 그러한 갈등 속에서 확답을 내리기가 어려웠다.

자신 나름의 저항을 펼치는 영혜를 살리려 하는 것은, 우리만의 해피엔딩에 도달하게 하는 것은 어쩌면 또 다른 폭력이 아닐까. 여전히 폭력에 대한 저항을 온몸으로 외치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녀에겐 이미 충분히 의미 있는 시간인 걸까?


두 번째로 책을 펼치면서, 머릿속에 남겨진 고민을 덧그려 본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붉게, 피어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