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의 냄새가 슬픔이 될 때

by 이지원

기분이 괜찮은 날에는 고기를 조금씩 먹어보았는데, 먹는 순간만큼은 꽤 나쁘지 않았다. 식탁 앞에서는 주로 가족이 함께 앉아 있고, 이야기와 약간의 농담, 식기가 달그락거리는 작은 소음으로 감정을 묻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가공육, 튀겨낸 해산물과 양념을 입혀 구워낸 고기 한 점, 기름에 부친 달걀의 냄새는 사람의 말과 손짓과 표정에 묻혔다. 다 괜찮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잠들 시간이 다가오고, 세상이 고요해지면 속은 어김없이 울렁거렸다. 왜일까, 왜일까. 홀로 누워 마음속을 뜯어보던 나는 그제야 이유를 알아냈다. 나를 뒤흔들었던 것은 기름의 자극도, 양념의 자극도 아니었다. 동물의 살에서 풍기는 비린내 탓이었다. 그 냄새가 병든 고양이의 몸에서 나는 냄새와 너무나도 닮아 있어서, 무의식적으로 고기의 비린내를 고양이의 냄새와 연결 짓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부모님은 종양이 터져서 생긴 고양이의 상처가 덧나지 않도록 매일같이 소독하고 붕대를 갈았다. 처음에는 조금 고개를 내두르고 말던 고양이가 어느 순간부터는 소리를 지르기 시작하고, 어느 순간부터는 아버지의 힘으로도 잡기 힘들 정도로 몸을 비틀기 시작했다. 새된 비명이 집안을 가를 때마다, 비릿한 냄새가 코를 찌를 때마다 나는 불안에 휩싸였다. 도통 아픈 티를 내지 않는 고양이가, 정말 손을 쓸 수 없을 만큼 아프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나기 때문이었다.


붕대를 갈고 반나절에서 하루 정도 지나면 고양이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우리 가족에게 다가와 머리를 비비고 밥을 달라고 보챘다. 영락없이 살아 있는 생명의 따뜻함과 천진한 얼굴 사이로 희미하게 비릿한 냄새가 끼얹어졌다. 안타까운 한숨과 씁쓸한 표정이 그 애의 눈에 비추어졌는데, 그 애는 그것을 아는지 모르는지 여전히 머리를 비비고 우리 가족의 손가락을 핥을 뿐이었다.



매 끼니마다 음식을 손수 준비하시는 어머니와 맛있는 음식을 사다 주시는 아버지께 '더는 고기를 못 먹겠다'라고 선언할 수가 없었다. 괜히 유난을 떠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심 탓이기도 했지만, 나 한 사람 때문에 가족 모두가 껄끄러운 얼굴로 식사를 하게 둘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를 위해 가장 맛있는 음식을 준비하시는 두 분에게 '고기를 못 먹겠다'라고 선언하는 것은 곧 '마음을 받지 않겠다'라고 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 정성만큼은 받아들이고 싶었기에 고기를 먹었다. 그러나 먹은 뒤에는 꼭 불안과 슬픔이 겹쳐졌다. 뱃속에서부터 냄새가 올라왔기 때문이었다.


왜 이번에는 감정이 더 무겁고, 신체화되어 나타날까?

반려동물과의 이별이 처음 있는 일은 아니다. 이전 글에서도 종종 언급했지만, 나는 재작년 봄에 첫째 고양이를 떠나보냈다. 노화로 인해 찾아온 병은 호전될 기미도 없이 더욱 나빠졌고, 어떤 희망조차도 가지기 어려울 정도로 그 속도가 빨랐다.

가족으로부터 부고를 전달받았을 때, 여러 사람이서 공동생활을 하는 기숙사에 있어야 했기에 감정을 마음껏 드러낼 수도 없었다. 바로 그다음 날부터 수업에 들어가야 했으므로 더욱 슬픔을 억눌러야 했다. 사람이 곁에 있을 땐 최대한 웃었다. 과할 정도로 따뜻하게, 과할 정도로 친절하게, 과할 정도로 밝게 행동하며 상실감을 억누르려 했다. 그러다 방 안에 홀로 남을 때가 오면 그제야 실컷 울었다. 그때는 슬픔을 최대한 억눌러야 했고, 무너질 수 없는 시기였다. 나는 빠르게 슬픔을 마음의 바닥으로 가라앉혔다.


그러나 둘째 고양이는 다르다. 삼 년 전에 병을 처음으로 진단받았고, 이미 그때 '종양을 절제하는 수술을 한다 해도, 나이가 많아 좋은 경과를 기대하기 어렵다'는 답변을 들었다. 그 삼 년이라는 시간도 매일같이 소독을 하고 붕대를 갈아주며 상처가 덧나는 것을 막았기 때문에 벌 수 있었다. 누가 보아도 나쁜 상태지만, 그 애는 괴로워하다가도 어느 순간 다시 생생한 눈빛이 되어 달려왔다. 그때만큼은 배에 붕대를 두르고 있다는 것만 제외하면 아픈 것 같지도 않았다. 식욕은 왕성했고, 손짓을 하면 달려와 무릎 위에 자리를 잡기도 했다. 첫째 고양이에 비하면 긴 시간 동안 함께하고 있으며, '오늘은 괜찮아 보이네!'라는 약간의 희망을 쥐게 했다.

그리고 주로 그 애를 보는 날은 지금 같은 방학이다. 단둘이 있을 시간도 길고, 그만큼 정적이기 때문에 감정을 깊이 느낄 수 있다. 함께 부대끼며 감정을 깊이 느끼니, 불안이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날 수밖에 없다.


짧은 기간으로, 깊게 억눌러야 했던 이전의 경험과 달리 이번 이별의 과정은 현재까지도 진행되고 있으며, 그만큼 감정을 길고 깊게 느끼고 있다. 또한 불안과 슬픔을 억누르지 않아도 되는 환경이기 때문에 여러 형태로 나타나는 것 같다.


정말 이별을 할 때가 오겠지만, 적어도 함께 있는 이 순간만큼은 온전히 사랑하고, 쉽게 하지 못했던 말들을 전부 털어놓고, 먹고 싶어하던 간식을 마음껏 먹게 해 주자.

오롯이 사랑하며 이별을 준비하자.

그리고 아직 따뜻함이 곁에 남아 있다는 것을 감사하게 여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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