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안한 사람이 되고 싶었던 내가 편안해지는 방법

by 이지원

'사람들에게 힘이 되어줘야 해.'

이는 아주 오래전부터 품고 있었던 나의 존재 이유 중 하나였다. 나는 사람들의 눈에 비치는 내가 '편안한 사람'이길 바랐고, '따뜻한 사람'이길 바랐다. 지친 마음을 포근하게 감싸 안아줄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어둡고 비좁아진 마음속에 홀로 덩그러니 남겨져 있는 것이 얼마나 아프고 무서운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말 너머를 보는 연습을 많이 했었다. 날이 선 말에 똑같이 욱하지 않는 법을 배웠고, 나의 내면을 몇 년 동안 관찰하고 메모장에 기록했다. 브런치에서 꾸준히 글을 썼던 것도 그 과정 중 하나였다. 감정을 담아내어 쓴 나의 글 너머에 있는 바람을 관찰하고, 그것을 집어내어 달래는 연습을 많이 했다. 이해하고, 관찰하고, 그 사람의 입장에 서서 똑같이 생각해 보는 연습. 그것을 통해 나는 내가 바라던 이미지에 많이 가까워졌다. 나를 만난 이들은 언제나 "너랑 있으면 마음이 참 편안해져.", "넌 정말 따뜻하고 다정해."라고 말했다. 그때마다 온몸이 새롭게 살아 숨 쉬는 것 같았다.


나와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것. 아주 오래전부터 인간관계에서 없어서는 안 될 덕목으로 존재했던 것. 부작용보다는 이점이 더 많을 것 같은 그 태도에도 뒷면이 있다는 것을 최근에서야 깨달았다. 보기 쉽게 숫자를 매겨 정리해 보자면 아래와 같다.


1. 정작 날 돌보지 못한다.

인간관계에서 '이해'하는 자세를 취하다 보면, 타인이 나를 믿고 넘어졌을 때 든든히 받쳐줄 수 있다. 그러나 그 힘이 점점 강하게 쏠리다 보면 나 역시도 중심을 잡지 못하고 픽 쓰러지고 만다. 나는 이제껏 만나온 연인과 친구, 핏줄이 이어진 가족의 마음을 들여다보느라 지금의 내 마음을 들여다보지 못했다. 잠시 그들의 곁에서 떨어져 나를 돌볼 시간도 갖지 못했다. 남들에게 "지금 이런 기분이구나, 그래서 많이 힘들었겠다."라는 말을 입이 마르도록 하면서도 나에게 같은 말을 건네지는 못했다. 그래서 언제나 대화가 끝나고 나면 외로움이 더 깊어졌다. 남을 이해하면 외로움 역시 줄어들 것이라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도 않았다. 누구나 다 같은 크기의 이해를 나누는 것이 아니고, 개인이 가진 마음의 여유도, 성격과 표현 방식도 모두 다르기 때문이다.


2. 피로감이 심화된다.

남을 이해한다는 것은 생각보다 마음의 에너지를 많이 소모하는 일이다. 나는 보통 남을 이해하려 할 때 그 사람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을 모두 적어보고, 이후에 본인에게 양해를 구한 뒤 직접 이야기를 들으며 잘못 이해하고 있었던 부분을 수정한다. 즉, 그 사람에 대한 '지도'를 만드는 것이다. 이것이 있으면 이후에 의문이 생겨도 '아, 이 사람은 이런 성향이었지. 그럼 지금 좀 힘들 수 있겠구나.'라고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생긴다. 이는 긍정적으로 보면 상대방을 더 깊게 이해하려는 노력으로 볼 수 있지만, 다르게 보면 그만큼 한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많은 에너지를 쓰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내가 이 사람을 이해해야 해.'라는 생각이 너무 강해지다 보면 내가 그 상황에서 입은 마음의 상처보다도 그 사람을 분석하는 것에 너무 많은 에너지를 쏟게 된다. 마음에 입은 상처는 그것대로 아프고, 그것을 치유하는 데 써야 할 에너지를 남을 분석하고 이해하는 데 모조리 써버리고 있으니 쉽게 탈진이 오는 것이다.



3. 관계가 노동처럼 느껴지기 시작한다.

이제껏 살아오며 인간관계를 기피하려 했던 이유를 생각해 보았는데, 그 이유는 바로 모든 관계가 노동이나 숙제처럼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마치 상담사처럼 그 사람이 가진 내면의 결핍이나 불안을 분석하고 이해하려 하니, 가족, 친구, 연인이 가진 본질적 의미(서로를 향한 격려와 지지)를 잊고 무조건 내가 돌보는 자의 위치에 서게 된다. 결국 돌봄은 양방향이 아닌 일방향으로 변하고, 처음 가지고 있었던 동기(내가 이 사람에게 힘이 되고 싶다)가 힘을 잃어 마치 노동이나 숙제처럼 느껴지기 시작한다. 공과 사가 명확히 구분되어 있는 상담사라면 내담자와의 관계에서만 이러한 태도를 취하면 되지만, 나의 경우에는 명백히 사적인 관계에서도 그들과 같은 태도를 유지했다. 그러니 언제나 긴장을 풀 수 없고, 늘 물가에 내놓은 아이를 보는 어머니의 심정으로 그들을 보게 된 것이다.


이와 같이 피로감을 느끼면서도, 나는 그들 스스로가 자신을 돌볼 수 있다는 사실을 자꾸만 잊었다. 몸에 입은 상처도 시간이 지나면 회복되듯이, 마음에 입은 상처도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회복이 된다. 그러나 나는 '이 사람에게 내가 힘이 되어줘야 해.'라는 의무감에 휩싸여 그들이 가진 회복탄력성을 보지 못했던 것이다. 이제 다 큰 성인을 걸음마도 뗄 수 없는 갓난아기로 보는 것과 같았다. 그러니 내가 도움이 되지 못하면 나의 존재 이유가 사라질 것 같았다. 그것이 무서웠을 뿐이다.

내가 그렇게 발을 동동거리지 않아도 생각보다 사람들은 잘 일어난다. 나는 친구나 가족이 줄 수 있는 양의 격려와 지지를 보내고, 그보다 우선적으로 나의 마음을 조금 더 살피고 이해하면 되는 것이다.

이제껏 마치 상담사처럼 남을 이해하고 돌보려 했던 이유는 바로 내가 그런 돌봄을 받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욕구를 쉽게 충족하기 어려우니 내가 원하는 돌봄과 이해를 남에게 쏟고 있었던 것이었다. 내가 듣고 싶었던 말들을 직접 입 밖으로 꺼내며 나는 안도감을 느껴왔다. 그리고 같은 정도의 노력을 그들도 나에게 기울여주길 바랐다. 어떻게 보면 그만큼의 보상을 바라고 했던 일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사람의 성격은 멀리서 보았을 때 통하는 부분이 있어 보여도 세세한 부분에서는 다르기 마련이다. 그들이 처한 상황도 모두 나와 같지는 않다. 그러니 같은 말을 들어도 내가 기대하는 반응이 무조건 돌아올 수는 없다. 그들은 그들 나름대로 최선을 다해 나를 이해하려 하지만, 내 기대치에는 미치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언제나 목마름을 느꼈다. '나는 이 사람을 이해하기 위해 이만큼의 시간과 노력을 투자했는데, 왜 내 마음은 채워지지가 않지?'라는 의문을 느끼고 입을 벌린 채로 같은 양의 노력과 관심이 떨어지길 바랐다. 그러나 내가 바라는 것은, 내 목마름은 어떤 사람이 와도 완벽히 채워줄 수 없다. 나의 목마름을 온전히 채울 사람은 나뿐이다. 나의 목마름과 나의 결핍은 내가 가장 잘 알기 때문이다.

이제는 너무 남에게 에너지를 쏟기보다는, 그 에너지를 분배해서 나에게도 나누어주는 것이 좋겠다. 그래야만 나의 바람을 지킬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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