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진 기억과 함께 감정도 무뎌졌다.
중요한 개인정보와 몇몇 지인을 제외하곤 아무것도 기억해 낼 수가 없다. 학교라고 부르는 곳에 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잊었다. 가끔 날 붙잡고 걱정스러운 얼굴로 괜찮은지 묻는 사람들이 있는데, 뭐라 답을 해야 할지 몰라 고개만 끄덕이고 빠르게 벗어난다. 나를 알고 있는 사람들.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나를 소개한 기억이 없다. 내 기억이 사라졌다는 걸 알고 있어도 무섭다.
기억을 잃는다는 것은 깊은 외로움을 안겨준다. 아무리 주변 사람들이 지워진 곳을 메꿔주어도 바로 지워진다.
본 적도 없는 이들이 내게 안부를 물을 때, 나는 그에 대한 답보다도 먼저 그들이 누구인지 묻고 싶다. 왜 통성명도 하지 않는 것인지 묻고 싶다. 그렇지만 턱끝까지 차오르는 그 물음이 명백히 부자연스럽다는 것을 알고 있다. 결국 가장 묻고 싶은 것은 묻지도 못하고 어색한 만남이 끝난다.
생각보다 많은 부분이 지워졌다. 채워지지도 않는다.
나는 내가 '학생'이라는 것도 모른다. '학생'이 무엇인지도 모른다. '시험'이 무엇인지도, '전공'이 무엇인지도 모르게 되었다. 그 단어의 뜻마저도 완전히 잊었고, 주변 사람들이 입이 마르도록 설명해도 머릿속에 저장되지 않는다. 뇌가 그 단어를, 그 뜻을 필사적으로 밀어낸다. 키우던 고양이가 어디로 갔는지, 왜 집에 돌아오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니, 사실은 고양이를 키웠는지도 헷갈린다.
아버지의 이름도, 얼굴도, 성격도 전부 잊었다.
사라진 부분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많다.
정말 사라진 것일까? 어쩌면 너무 고통스러워서 아주 깊은 곳에 묻어둔 것은 아닐까?
기억이 사라졌어도 감정은 선명히 남아있다. 아주 싫은 감정. 멀리멀리 도망치고 싶다는 느낌. 무력감, 괴로움.
못 견디게 외롭다. 매일같이 기억이 사라지니 인사조차도 편하게 하지 못한다. 누군가가 먼저 인사를 해도 기억이 없으니 경계부터 하게 된다. 사람이 없는 곳만을 골라 걷는다. 기억에 없는 사람들을 마주치는 것이 무섭기 때문이다.
단기기억력도 떨어져서 이제는 자주 연락하지 않으면 금방 잊는다. 필사적으로 사진을 찾아보거나 좋았던 추억을 반복적으로 떠올리며 기억을 붙잡는다.
이제는 감정도 무뎌졌다. 우울하지는 않지만 기쁘지도 않다. SNS도 오래 보고 있자니 피곤하다. 책에도 눈이 가지 않는다. 나무도, 하늘도 내게 기쁨을 가져다주지 않는다.
마음의 병을 낫게 하는 것은 생각보다 더 어렵고 아프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