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생각을 하고, 멍하니, 아주 까마득한 곳을 바라보았다.
약을 먹으면 인생에 아주 활기가 돌 것이라 믿었다.
묵은 아픔을 단번에 지울 수 있을 거라 믿었어.
그렇지만 묵은 때가 쉽게 지워지지 않듯이, 마음에 앉은 때도 오래 묵으면 쉽게 지워지지 않는다.
10년 이상을 함께해 왔고, 이제야 우울증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니 그럴 만하다.
울지는 않지만, 웃지도 않고, 언제나 모르는 것들 투성이.
무던하다가도 칼처럼 뾰족하게 날이 서는 마음.
나를 위해서라도 내가 죽어야 한다는 정체 모를 생각.
더 이상은 작년처럼 환각을 보거나, 기이한 소리를 듣지도 않는다. 약물치료를 시작하고 나서는 가위에 눌린 적도 없다. 잠자리는 평온하고,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반복되던 조롱도 잦아들었다.
감정의 롤러코스터가 멈춘 느낌이라고 할까? 기분의 최저점도 최고점도 사라진 기분이다. 마치 평지를 걷는 듯한 기분. 돌부리가 없고, 패인 곳도 없다. 평온하면서도 공허한 기분.
우울증 속의 우울감은 보통 사람들의 우울감과는 결이 다르다. 특별한 이유가 없다. 스스로 이유를 물어도 답을 할 수가 없다. 이 기분이 너무 익숙해서 굳이 답을 찾고 싶지도 않다. 슬프지도 않고, 그저 공허하다. 좋아하던 것을 봐도 기쁘지 않다. 아주 낯설고 생소하다.
왠지 모르게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더 이상 '그러면 편해지겠지.', '그러면 행복해지겠지.'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익숙한 대로, 오래 걸어왔던 생각 위를 걷는 느낌이다.
그러나 약물치료를 시작한 뒤로는 죽음에 대한 생각이 오래가진 않는다. 무엇을 생각하고 있었는지 서서히 잊는다.
'내가 왜 이러지?'라는 생각을 하지도 않는다. 이제 더 이상 밤을 새워 가며 인터넷에 증상을 검색하지도 않는다. 오늘만 보고 사는 동물이 된 기분. 어제는 무엇을 했는지도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머릿속은 훨씬 가벼워졌으니 차라리 다행인 것일지도 모른다.
자야지, 잘 자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