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시간에서야 아픈 기억이 떠올랐어요. 아마 낮이 되면 희미해질 테니 지금 적어두기로 해요.
틀림없이 아픈 기억이지만, 지금 보면 아픔보다는 안타까움이 많이 느껴지는 기억이에요. 가족에 대한 기억들이 떠올랐거든요.
아버지. 때로는 친근하고, 때로는 감사하면서도 아주 무서운 사람. 아버지는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술을 참 자주 드셨어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는 생각했는데, 이상하게 술을 드실 때마다 집안에서 큰 소리가 났지요. 분명 엄마가 꺼 뒀던 거실 전등이 전부 켜져 있고, 우리 남매가 자는 안방 문틈으로 하얀빛이 한 줄기 들어와요.
잠을 자던 엄마를 깨워 식탁 앞에 앉힌 아버지는 처음엔 기분이 아주 좋아 보였어요. 억지로 엄마에게 음식을 권하고, 엄마가 거절하면 그때부터는 기분이 나빠졌지요. 온갖 욕이 난무하고, 물건을 집어던지는 소리도 들리고, 마구 악을 쓰는 소리도 들렸어요. 우당탕탕, 무언가 넘어지는 소리가 들리면 내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러요.
'저 소리는 엄마가 넘어진 소리일까, 가구가 넘어진 소리일까? 엄마가 다친 건가? 그럼 나는 뭘 해야 하지? 경찰에 신고해야 하나? 그러다 아빠한테 들키면 어떡해. 그럼 난 죽으려나?'
그러다 끝내는, 저렇게 소리를 지르는 아저씨가 다정하고 자상한 우리 아빠일 리 없다고 생각해요. 분명 출근 때까지만 해도 아빠는 엄마에게 뽀뽀도 해주고, 웃는 얼굴로 집을 나섰는데 밤늦은 시간만 되면 아빠로 둔갑한 괴물이 들어와요. 집에서도 유리병을 내려놓는 소리, '크-' 하고 술을 들이켜는 소리가 새벽 늦게까지 이어져요.
엄마는 오롯이 혼자서 아버지의 주정을 받아내요. 걱정이 되어서 내가 나오면, 엄마는 서둘러 나를 방으로 돌려보내요. 결국 나는 뜬눈으로 밤을 지새워요. 그렇게 온 신경을 거실 쪽으로 곤두세우고서, 큰 소리가 나지 않는지 살피죠. 푸른 새벽빛이 방을 가득 물들이고, 보이지 않던 안방의 풍경이 서서히 눈에 들어올 때쯤이면 거실에서 아빠가 코를 고는 소리가 들려요. 나는 그때가 되어서야 살금살금 방 밖으로 나와서, 아빠가 자는 거실을 지나쳐 엄마가 있을 큰방에 가요.
찬 바닥에서 얇은 이불만 덮고 누운 엄마의 품을 파고들고, 상처가 없는지 확인하고 나서 엄마의 코밑에 손가락을 대 봐요.
가늘고 따뜻한 숨이 느껴지면 그제야 안심하고 기절하듯 잠들어요.
그런 나날이 반복되다, 어느 날에는 형광색 조끼를 입은 사람들이 집안으로 들어왔지요. 내 얼굴의 반은 빨간색, 반은 파란색으로 뒤덮였어요. 그리고 곧바로 들려오는 사이렌 소리, 드라마에서 많이 듣던 소리.
우당탕탕, 소리가 나더니 아빠 또래의 경찰관과, 젊은 경찰관이 안방으로 들어왔어요.
"애기 몸은 괜찮은가 봐 봐."
"다친 곳은 없네요."
나는 그 젊은 경찰관과 눈이 마주쳤는데, 그의 눈은 아주 슬퍼 보였어요. 내가 온 힘으로 끌어안아 부서진 장난감에 시선을 두다가, 눈물 때문에 잔뜩 부은 두 눈을 다시 바라보더군요.
"이제 괜찮아, 어서 푹 자렴."
그분은 그렇게 말하고 안방의 전등을 끄고, 방문을 조용히 닫았어요. 그날의 풍경은 아직도 머릿속에 선명히 남아있어요.
내가 다 크고 나서야 아버지는 술을 끊으셨어요.
그리고 상처를 입혀서 정말 미안하다고 사과하셨죠.
그래도 그때의 기억이 이렇게 선명하게 남아있는 것을 보면, 그때의 나는 많이 아팠나 봐요.
그 무력감과 죄책감 속의 나를 꼭 안아주고 싶어요.
그때의 무력감과 죄책감이 나에게로 다시 향하고,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죽어야겠다는 생각을 반복하는 나를 꼭 안아주고 싶어요.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저 두려워하던 그 어린아이를 지금이라도 꼭 안아주고 싶어요.
그러면 나는 현재로 돌아올 수 있겠죠?
그러면 이제 '아빠'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나는 아빠를 많이 무서워하지만,
그래도 아빠가 나중에 천벌을 받지는 않았으면 좋겠어요.
나를 많이 무섭게 했지만,
동시에 나를 가장 행복하게 해 주던 사람이기도 했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