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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원 Oct 01. 2024

해방

갑갑함은 곧 새로운 곳으로 나아가길 원한다는 것.

더운물 앞에 서서 몸을 씻어낼 적마다 생각은 새롭게 태어나고 머릿속에는 부옇게 김이 서린다.

 우울은 물에 잘 녹는 줄만 알았는데 어째 북북 닦아내면 닦아낼수록 더 짙어진다. 물을 끼얹을 때마다 자꾸만 마음 깊은 곳에 새겨두었던 상처가 보인다. 이제는 다 아물었을 텐데.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향의 거품이 몸을 문지를 때마다 속이 울렁거렸다. 텁텁한 생각만 훑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가슴 안쪽이 한 칸씩 좁아지니 씁쓸하기만 했다.
 
 몸을 씻어내고 나서도 무언가 찝찝하다. 자꾸만 같은 곳을 도는 것이 썩 달갑지 않았다. 떨떠름한 얼굴을 하고 머리를 까딱이는 것도 그만두고 싶어 몇 번이나 몸을 뒤척였지만 나는 여전히 갑갑한 방 안에 몸을 구겨 넣은 채로 덜덜대는 선풍기의 바람을 맞고 있었다. 덜 마른 머리카락이 바람에 밀려 흐트러졌다. 어깨가 축축하게 젖었다.

 젖은 머리를 얼추 다 말리고 나서는 불을 끄고 누웠다. 묵직한 밤이 머리를 디밀고 있는 그 공간에서 보이지도 않는 천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저 가운데에 새하얗게 달이나 뜨면 좋으련만. 얼룩 하나 없는 것이 또 가슴을 아프게 짓누르며 새로운 멍자국을 만들어냈다. 가만히 있다가는 구멍이 숭숭 뚫려버릴 것 같아 팔을 베고 옆으로 돌아누웠다. 끊임없이 눈만 굴린다.

 입에 붙어버린 도망이란 단어를 자꾸만 찾았다. 식상하니 이제는 별 구미가 당기지도 않았다. 결국 나는 눈을 감고 그럴싸한 생각으로 채울 것이 뻔하기에.

 지겹도록 입에 담았던 죽음이란 단어에도 어쩐지 둔해진 것만 같다. 긴 꼬리를 달고 몸에 남아있을 낙인도 보이지가 않았다. 있을 때는 그렇게 성가시더니 사라지고 나니 또 그리워지고 만다. 이해할 수 없는 변덕이다.

 한참을 드러누워 있다 결핍이니 불안이니, 신물이 나도록 파헤치고 뒤집어 가며 살폈던 그런 단어들을 또 열어 보았다. 먹을 것을 찾는 짐승처럼 머리를 박고 계속해서 글감을 찾는다. 그러나 입에 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싱겁게 입맛만 다시고 좁아진 가슴팍을 원망한다.


그러다 문득 조금 더 넓은 곳에 몸을 던져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보았다.

어쩌면 하나의 해방을 원하는지도 모르겠다.

알고 있던 세상을 뚫고 나아갈 용기.
그것을 손에 쥔다면 5년이 지나도록 붙들고 있었던 결핍과 불안의 눈을 조금은 놓아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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