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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원 Oct 06. 2024

몸부림

도망친 끝에 낙원은 없다지만

 가장 좋아하는 것이 무어냐고 묻는다면 그저 먼 곳으로 도망치는 것.

충동성이 다분히 녹아들어 있긴 하지만 갑작스러운 도망을 좋아한다. 예고 없이 불어닥치는 그런 것들 말이다.  부딪힐 줄 모르고 도망친다고, 그러다간 사람이 점점 물러지다 무너지고야 말 것이라고 쓴소리를 몇 번 들었지만 그래도 나는 도망치는 것이 좋다.


 어리석음을 이야기한들 그것이 귀에 들리기나 할까? 도피하는 순간만큼은 나의 세상엔 나밖에 없는 것을. 내가 가진 결핍과 내가 가진 불안의 입을 틀어막기 위한 최고의 수단이었다. 멀쩡한 얼굴을 하고 살기 위해서 하루 정도는 도망치는 것이 필요하다고 여겼다. 불안을 잡아먹고 살을 찌운 새로운 욕망이 고개를 들었을 때였다.


 밤중에 눈을 뜨고 있는 불빛들을 좋아한다. 바깥의 바람을 좋아한다. 무작정 도망치고 싶어 늦은 밤에 창밖을 가만히 보았던 적이 많다.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에 서글픔을 느끼며 새벽까지 잠을 자지 못한 채로 눈을 뜨고 있었던 적도 많았다. 통제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한 괴로움은 생각보다 강한 힘으로 기분을 끌어내렸다.


 돌아갈 곳이 있기에 도망에 의미가 생긴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가끔은 돌아갈 곳도 잊고 몇 날 며칠을 도망만 치고 싶었다. 나는 나의 퇴행을 허락하지 않으려 했으나 도망을 간 그 순간만큼은 나의 퇴행을 허락하고 싶었다. 잠투정을 부리고 머리를 처박은 채로 울어도 괜찮은 곳으로 가고 싶었다. 내가 잘못된 게 아니라고 몇 번이나 확인받고 싶었다.


 자리에 누워 이불을 끌어올리다 문득 나의 결핍은 나도 타인도 채울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싶어 두려워지기 시작했다. 일시적인 도망이라는 수단에만 의지해야 한다면 그 누구도 나의 결핍과 불안을 해결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나는 괜찮지 않은지 괜찮은지도 모른 채로 나를 속이고 겉을 멀쩡해 보이는 가죽으로 감싸고 살아가는 것이다. 그게 멀쩡한지 아닌지도 사실 모르겠다. 그냥, 그냥 사는 것이다. 기쁘면 기쁜 대로 슬프면 슬픈 대로, 그냥 렇게.


 알아채지 못하면 끝은 없다. 이제야 붕괴하기 시작한 것인지, 아니면 꽤 오래전에 무너졌다 다시 일어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잘 이겨내고 있을 거라는 말로 희망을 흘려 넣을 수밖에. 그 말이 진실이길 바라고 또 바랄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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