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절은 기쁨, 나머지는 슬픔

우울과 해리

by 이지원

모든 것을 잊었다. 왜인지는 모른다. 외로움을 한 아름 안고 숨을 쉬다가 모든 것이 사라져 버렸다.

무엇이 있었는지 말을 할 수가 없다. 친구, (아마도 있을 것이라 생각하는) 연인, 부모까지. 모든 것들이 보이지 않는 파도에 휩쓸려 사라졌다. 한없이 무너지려다, 다음 주에 다시 가는 상담센터에서 무너지기로 했다.


조금이라도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면 아픈 기억들이 전부 떠오르니, 뇌에서 필사적으로 비슷한 감정을 느끼지 못하도록 하는 것 같다. 마주하기 싫지만 마주해야 하는 것. 그것이 바로 고통과 우울이었다. 억지로 파고든다고 해서 기억이 떠오르지도 않는다. 나의 다른 자아는 언제나 우울과 관련된 기억을 없애고, 대신 아무 일에 집중하도록 만든다. 그러고 나서 긴장이 풀리면 조금씩 기억을 되돌려준다.


'어쩌면 지금 이 상태가 가장 편한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해 봤다. 내 자아가 둘로 분리되면서부터 삶의 질은 더욱 올라갔으니까. 더 이상 쓸데없는 걱정에 끙끙 앓지 않아도 되었고, 있지도 않은 일에 불안해할 필요도 없었다. 사람의 말투 하나하나를 밤새도록 분석하는 일도 없었다. 애초에 그 사람이 있었는지조차도 깨끗이 잊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나의 뇌는 무언가 무거운 감정이 들이닥치면 쥐고 있던 모든 기억을 삭제해 버린다. 우울을 없애는 데 온 힘을 끌어 쓰기 때문에 다른 것들을 처리할 힘이 없나 보다. 그저 그 애를 다독이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로 하나씩 채워나가는 수밖에는 없겠다.


그래서 며칠 전에는 옷을 샀다. 언제나 눈에 띄는 것을 두려워했기에 튀는 색깔의 옷을 사지 않았는데, 그날은 새로운 경험을 하게 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가장 눈에 띄는 빨간색 스웨터를 사 보았다. 부드럽고 포근한 감촉이 몸을 감쌌다. 아주 새로운 것이 들어오니 머리가 맑아졌다. 이제 다시 기억을 잃어도 이 스웨터를 입으면 금방 안정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분명히, 괜찮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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