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지원 Oct 07. 2024

덮지 않아도, 꾸미지 않아도

 오래간만에 푹 자고 일어났다.

졸음이 아직 머리에서 완전히 가신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기분은 꽤 괜찮다. 아무렇게나 엉킨 채로 놓여 있던 사고가 조금 정리되었다. 생각이 단순해진 느낌. 얼마 가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의 기분을 최대한 만끽하고 싶다.


 대단한 무언가를 하지 않았다. 신경 써서 꾸미지 않은 채로 일상을 시작했다. 덮어쓰고 가리기보다는 최대한 가벼운 모습으로 하루를 살고 싶었다. 정성껏 빨아서 보송하게 말려둔 청바지가 있었으나 편한 고무줄 바지를 입었다. 그토록 좋아하는 흰색의 옷이 있었으나 음식이 묻는 것을 신경 쓰기 싫어 가벼운 검은색 옷을 입었다.


 내가 가진 불안을 훌훌 불어 날릴 수는 없어도 잠시나마 재워두고 싶었다.


 부쩍 가을의 향기가 묻어 나오는 바람이 돌기 시작했다.


 "지원아, 이것 좀 봐."


그리운 목소리와 함께 십 년 전 즈음의 기억이 문을 두드렸다.


 어릴 적에 갔던 수련회에서는 활동적인 것을 많이 했다. 몸을 많이 움직여야 했기에 그런 일을 할 때는 그냥 혼자 남아 있었다. 담임 선생님께서는 가만히 나를 바라보시다가 손을 부드럽게 잡고 의자에 퍼져 있던 내 몸을 떼어내셨다.


 "선생님이랑 산책이나 할까?"



 선생님께서는 손을 잡고 성큼성큼 산속으로 들어가셨다. 나뭇잎 냄새가 코를 간질이는 곳까지. 가끔씩 가벼운 이야기를 나누며 그저 발밑에 떨어진 나뭇잎을 밟아갈 뿐이었지만 선생님의 얼굴에는 따뜻한 미소가 가득했다. 가을빛이 선생님의 단발머리에서 미끄러졌다. 햇빛의 향기가 등을 떠밀었다.


 시야가 탁 트이는 곳에서 쪽빛의 가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발이 땅에 닿아 있다는 것마저도 잊을 정도로 황홀하기만 했다. 몇 점의 구름이 느린 걸음으로 흘러갔다. 가을의 단맛이 온몸을 감싸 안았다.


 "너무 예뻐요."


홀린 듯한 탄성에 선생님께서는 뿌듯한 웃음을 지으셨다. 선생님의 맑은 두 눈에도 가을하늘이 내려앉아 있었다. 달큼한 향기가 나는, 그 가을 하늘이.


돌아오는 길에는 단풍잎을 하나씩 주웠다. 선생님께서는 가장 선명하게 붉은색을 내는 단풍잎을 건네주시며,


"예쁘다. 그치? 이거, 코팅해서 책갈피로 쓰면 좋아."


어린아이처럼 행복한 웃음을 지으셨다.


설렘이 가득 피어 있는 웃음을.



 그 단풍잎 한 장이 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마음속에 남아 맴돌고 있다.

가을이 오면 심심찮게 볼 수 있는 단풍잎이건만 나는 아직도 그때의 단풍잎을 잊지 못하고 있다.

파란 가을 하늘을 두 눈에 담아내던 그 10월이 아직도 가슴 한편에 남아 있다.


꾸미지 않고 덮지 않았던 그 어린아이가 남아 있다.

작가의 이전글 생각 파묻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