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울증이란 어떤 병일까? 사람마다 느끼는 것이 다르겠지만, 나는 자책이 멈추지 않는 병이라고 생각한다.
처음 우울 속에 발을 들였을 때부터 그랬다. 사람의 작은 한숨도 나를 향한 것처럼 느껴졌다. 내가 뭔가 잘못해서, 내가 누군가에게 짐이 되어서 한숨을 쉬는 것이라 생각했다. 마음의 피부가 벗겨져 쓰라리고 아팠다. 아무 일도 없었지만 마음에서는 위험을 알리는 경보가 끊이지를 않았다.
내 평생을 살아오며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이것이었다.
"아니, 대체 왜 그러는데?"
"자책 좀 그만해. 그런다고 뭐가 해결돼?"
"왜 그런 쓸데없는 생각만 해?"
이 밖에서 보는 사람들은 자책을 멈추라고 한다. 어떻게든 자책의 질긴 고리를 끊어내려 안달이 났다. 그 마음이 어디서 비롯되는지는 알고 있다. 걱정이다. 그들이 원래 알던 밝고 희망찬 모습으로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 잘못될까 걱정하는 마음. 다 알고 있다. 나도 그들이 하는 말을 똑같이 마음으로 반복하며 살고 있으니까. 이 자책을 끊어내야 하는 것은 알고 있는데, 자꾸만 그곳으로 흘러들어 간다. 그래서 사람들을 볼 때마다 면목이 없다. (섬세한 사람들은 금방 알아챘겠지만 또 자책하고 있다.)
스스로 막아낼 수 없는 자책. 그 덩치가 점점 커지면 이제 죽음으로 변한다. 거친 손이 나를 죽음으로 이끈다. 우울이 가장 심했을 땐 정말 잠도 안 자고 죽는 방법을 검색했다.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한다. 왜 이렇게 나의 죽음을 바라는지. 왜 매일 내가 죽게 해달라고 기도하며 눈을 뜨는지. 뭐가 그렇게 힘든지, 어디서 그것이 시작되었는지. 나조차도 모르는 우울의 근원을 바깥사람들은 자꾸 알려달라고 한다. 나도 잘 모른다. 애초에 우울증의 원인은 제대로 밝혀진 적이 없다. 답이 없는 곳에서 자꾸 답을 찾아내려 하니 모두가 지치는 것은 당연하다. 그들은 이 통제할 수 없는 소용돌이에서 단 하나라도 바꾸기 위해, 우울의 겉껍데기인 나를 붙잡고 부르짖는다.
"제발 그만 좀 해!"
나를 붙잡고 울부짖는 사람들을 보면 알 수 있다. 그 눈에 무엇이 맺혀 있는지. 어서 나아지길 바라는 마음, 어서 괜찮아지길 바라는 마음이다.
그런데 신기하지. 다리가 부러진 사람을 보고 "제발 그만 좀 해!"라며 울부짖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지 말라니까!"라고 하는 사람도 없다. 정신병은 눈에 보이는 실체가 없기 때문에 생각보다 심각해 보이지 않는 경우가 많다. 그냥 좀 조용한 사람, 그냥 좀 부정적인 사람으로 보일 뿐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부정적인 생각도 환자의 의지대로 멈출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게 되는 사람이 있으면 그게 안 되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약의 도움을 받으며 자책의 소리를 줄이는 것이다.
약이 안 맞으면 자책과 우울이 더 심해지기도 한다. '항'우울제인데 왜 우울을 심하게 하냐고? 사실 그건 나도 잘 모르겠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정신과약은 자살사고를 더 강하게 할 수 있다는 설명이 꼭 붙어있더라. 특히 젊은 환자에서 그런 것이 더 강하게 두드러진다고 했다. 그래서, 약을 먹었는데도 자책이 더 심해질 수도 있고 무슨 얘기를 해도 죽음으로 흘러갈 수도 있다. 맞는 약을 찾으면 이 자책과 우울은 많이 줄어든다.
실제로 큰 병원에서 처방해 준 항우울제를 먹었을 땐 자살사고와 자책이 아주 심해졌지만, 다른 병원에서 처방해 준 약은 나의 자책과 자살사고를 빠르게 없애주었다. 물론 먹다 보면 또 그런 생각이 심해질 수도 있겠지만, 지금은 꽤 쾌적한 하루를 살고 있다. 그러니 내가 난데없이 자책이나 우울한 소리를 늘어놓는다면 그냥 '저것도 병의 증상이겠구나', '지금 약이 잘 안 맞나 보다'라고 생각하면 조금 더 편할 것이다.
물론 나도 자책의 소리를 줄이기 위해 운동을 시작했다. 드라마틱한 효과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삼십 분 정도 땀 흘리며 운동하다 보면 뾰족하게 날 서 있던 마음이 조금 둥글어진다. 이제는 운동할 만큼의 활력도 생겼으니 몸과 마음의 건강을 잘 가꾸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