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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원 Oct 24. 2024

깨어난 날

당겨지던 불안감이 조금은 느슨해졌다. 감정이 차분해지는 시기가 다시 돌아왔다.

이제야, 이제야 좀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다.


일주일간 잠을 설치고 밥을 거르면서 나는 나의 껍데기를 찢고 나와 있었다. 누구인지도 모르겠더라. 걸음을 옮기는 것도 힘이 들어 겨우겨우 세 걸음을 떼고 허리를 숙여 숨을 고르길 반복해야 했다. 목을 타고 흐르던 사랑을 몰랐고 팔을 감싸던 온기를 알 수가 없었다. 눈동자 위에서 떠도는 공허함을 고개를 숙여 가며 맞아들여야 했고 불안의 등을 어루만지며 새벽을 머리맡에 두고 잠의 꼬리를 붙잡아야 했다.


아, 쇠약해진 틈을 타고 찾아와 핏발 선 눈을 하고 목을 죄던 불안과 불면과 우울이었다.


정기 연재를 하던 작품을 잠시 쉬어갔던 이유를 이야기해 보자면 곧  올라갈 '전환'이라는 회차를 도저히 써 내려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무엇을 해도 이야기의 전개가 머리를 틀고 새까만 구멍 속에 처박혀 버리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분명히 수면 위로 떠올랐고 그곳에서 새로운 숨을 마셨는데, 텁텁한 우울로 인해 그 새로운 탄생의 순간이 뭉그러지고 맑은 색이 흐려지는 것이 싫었다. 현재의 감정은 최대한 배제하고 써 내려가야 하는 것이지만 쉽지가 않았다.


이것은 곧 나의 역량 부족이다. 그렇지만 작은 변명을 해보자면 나는 그저 내 눈앞에서 솔직하고 싶었을 뿐이다. 맑은 감정은 맑은 기분으로 전하고 싶었다. 그렇지 않으면 자꾸만 나는 나의 맑은 기억에 흠집을 내려 든다. 전환이니 뭐니 하는 것도 다 착각이라고. 바로 전에 연재하던 회차에서는 자신의 눈을 똑바로 볼 수 있게 되었다며 기세 좋게 이야기해 놓고는 고개를 떨군 채로 나의 우울을 제대로 보살피지도 못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결국 나를 안고 살아가야 하는 운명이니 정성껏 보살필 수밖에는 없다. 음식도 물도 거부하는 속을 다독이며 뭐라도 입에 넣고 씹는다든가, 씻기도 싫고 일어나기도 싫다며 손을 뿌리치는 그 아이의 눈에 고인 눈물을 닦는 것. 내가 해야 하는 일은 그런 것이었다.


어쩌다 굵은 눈물이 흐르면 그냥 흐르게 두었다. 오히려 다행이라 생각했다. 슬픔이라는 감정이 아직 완전히 죽지 않았다는 증거인 것 같아서. 서러워도 좀처럼 눈물이 흐르지 않았는데 그날은 그냥 두꺼운 이불 위에 고개를 파묻고 소리 죽여 울었다. 괴로웠지만 한편으로는 깊이 안도하고 있었다.

눈가가 젖어들고 뜨거운 눈물이 볼을 타고 흐르는 것이 낯설었다. 뻣뻣하게 굳어 아파오는 목과 저릿한 턱도 낯설었다. 그때만큼은 그저 스스로를 안아줄 수밖에는 없었다. 머리를 쓰다듬고 더 이상은 약해지지 않도록 이불을 덮어주었다. 약을 먹였고 김이 피어오르는 따스한 차를 마시게 했다. 그냥 그렇게 가라앉힐 수밖에. 내가 사라지면 모든 것이 사라져 버리니.


그렇게 누워서는, 그냥 예쁜 꽃을 보러 가고 싶다고 생각했다.

흐드러지게 피어난 이름 모를 꽃들 속에 파묻혀 탁 트인 쪽빛 하늘을 보고 싶다고 생각했다.


머리맡에서 모여 얼굴을 타고 흐를 가을의 햇살을 생각하며

언젠가는 꼭 달콤한 꽃 속에 몸을 묻은 채로 사랑을 스며들게 하겠다고.


나에게,

너에게,

내 입으로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인 모두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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