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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원 Oct 30. 2024

마음 장례식

"들었어? 그 애, 죽었대."


그런 식으로 입에 오르내리길 몇 년째 기다리고 있다. 그런데 사람이 죽는다는 건 기다리기만 해서는 이루어지지 않는 것만 같다. 텔레비전 안에서는 멋지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내일 당장 죽을지 모른다'라고 이야기하며 삶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말을 지겹도록 하지만, 글쎄. 지금의 나에게 삶이란 것은 그다지 가치가 없다. 애초에 내일 당장 죽을지 모른다는 말은 더 이상 나를 움직이게 하지 않았다. 그 기대는 몇 번이나 깨지고 부서져 발밑에 뒹굴고 있으니까.


 내가 없으면 주변 사람들이 더 행복해질 수 있을 것만 같다. 물론 그렇지 않을 것이라는 것도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큰 실례라는 것도 분명히 알고 있다. 그래도 나는 내가 죽어 없어지는 편이 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할 수 있을 것만 같아서 언제나 스스로를 죽음으로 내몰기 위해 눈을 뜨고 벼르고 있다. 장기적인 미래도 보이지 않고 만들어나갈 마음도 없다. 그러니 나처럼 생산적이지 못한 사람은 내가 스스로 솎아내는 편이 좋을 것이다. 남에게 맡기기에는 그 사람에게 너무나도 미안하니까.


 삶의 끝을 그리고 있다는 말을 입에 담을 기회는 몇 번이나 있었다. 그런데 정작 기회가 다가오면 입에서 튀어나오질 않는다. 어떤 미련도 없고 희망도 없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있는데 말이다. 아마도 죽음을 폭탄처럼 생각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입에 담아서도 안되고 나와 타인을 향해 던져서는 안 될 것. 아주 민감하고 아픈 주제. 그러니 이렇게 글로 담아내는 수밖에는 없다. 내 목소리가 제대로 들리지도 않을 곳에서 곧 흩어질 메아리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한편으론 정말 죽고 싶다기보다 그저 쉬고 싶다는 말을 강하게 표현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어쨌든 기분이 좋아질 만한 자극은 우울을 잠재울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아무리 쉬어도 불안이나 우울은 갖가지 이유를 대며 곁을 떠나지 않았다. 뒤처지는 것에 대한 불안, 곁에 머무는 현실을 외면한다며 비난하는 우울.


그렇지만 그들이 아무리 죽으라며 손을 흔들고 저주를 퍼부어도 나의 몸은 무겁게 눌러앉은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살고 싶다기보다는 그냥 무서워서 그렇다더라. 아마 겁을 상실하는 약을 먹는다면 나는 가장 먼저 창문부터 벌컥 열지 않을까 싶다. 그런데 한편으론 그렇게 되는 것마저 무서워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살아간다. 기약 없는 죽음을 기다리며.

살아간다는 말마저도 버거워서 살아가고 있다고도 하지 않으려 한다.


나는 그저 여기에 있다.

이 자리에서 쭉 맴돌고 있다.

몇 번이나 죽은 마음 앞에 꽃을 놓는다.


하얗게 빛나는 꽃 한 송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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