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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원 Nov 10. 2024

괜찮아, 괜찮아

주문처럼 외우게 되는 말이 있지.

괜찮아, 괜찮아.


 내가 어렸을 적에 어머니께서는 하루를 잘 보낼 수 있게 해주는 마법의 향기라며 목 뒤에 향기가 나는 무언가를 발라 주셨고, 그게 좋아서 깔깔 웃다가 학교로 발걸음을 하곤 했었다.

아주 사소한 행동이 아직도 기억의 저편에서 푹 익어 있다가, 낯익은 향을 풍기며 떠오른다.


오늘 쓰는 글은, 그런 추억의 향을 맡으며 쓰는 글.

동시에 자신에게 건네는 작은 위로.



 진로를 정했다. 글을 쓰고 싶었다. 돈을 못 번대도 좋았다. 나는 내가 담아내는 이야기가 좋았고, 글이라는 것을 통해 조금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것이 좋았다.

대단하지는 않아도 글은 내게 삶을 주었고 숨을 쉴 수 있게 해 주었다.


 떠밀리듯이 살아왔었다. 자그마치 20년이라는 시간 동안 등을 떠밀리며 달리는 듯 아닌 듯 애매한 삶을 살아왔다. 결국 결정은 내가 내린 것이라고 하지만 시간에 쫓긴다는 느낌이 강했다. 어쩔 수 없는, 그런 것들.

나는 앞길을 정하는 것에 시간이 꽤 필요한 사람이었다. 먹고 싶은 것마저도 오래 고민하고 신중히 선택하는 사람이니 말이다.


그러나 확정을 짓지 못할 뿐, 하고 싶은 것과 아닌 것이 뚜렷한 사람이었다.


고집을 부리는 것처럼, 때론 끌려가는 것처럼. 머리를 들어 일어서려고도 했다가 다시 눌리는 삶을 반복해서 굴리고 있었다. 흐르는 시간은 야속했고 시간에 허리까지 잡아먹혔을 즈음에야 정신이 들었다.


'뭐 해서 벌어먹고 살래?'


 벌어먹는 거, 사실 장기전이니까. 뷔페처럼 원하는 걸 마음껏 골라먹을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물론 직업이 평생 갈 것이라는 생각도 하지 않지만 그래도 기왕이면 가장 오래 즐길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월을 등에 진 어른들은 안정에 집중하셨고 안정의 대명사격인 직업을 추천했다. 맞는 말씀이라며 고개를 주억거리다가도 새빨간 싹이 머리를 들고야 마는 것이 싫기도 했었다. 아무리 안정적이라고 해도 내가 즐거움을 느끼지 못한다면 안정은 깨지고야 마는걸.


 그렇지만 나보다 오랜 세월을 살아가며 깊이 새겨진 생각이 틀리지는 않을 것이라고도 생각했었다. 나는 나의 삶을 살고 싶어 하면서도 정말 스스로의 앞길을 혼자서 결정하는 것이 무서워 자꾸만 뒤를 돌아보았다. 괜찮다는 말이 주변에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른들의 꿈이 나의 꿈에 녹아 붙었던 적이 있었다. 처음에는 '무언가가 되어야 한다'라는 말에 매달리느라 스스로를 돌보지 못했다. 내가 그 직업에 닿지 못하면 부스러져 사라질 것만 같아서, 무서웠다.


그렇지만 그 말의 너머를 보아야 한다. 왜 어른들은 내게 안정적인 직업을 권하시는 것일까?


"... 저는 배가 고파 봤잖아요. 우리 딸, 지원이는 그런 길 걷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맛있는 거 많이 먹고, 따뜻한 곳에서 몸 안 상하고 편하게 살았으면 좋겠어요. 나중에 멋진 사람하고 결혼도 하고..."


 아빠는 그런 말씀을 하셨었다.

가끔, 내가 아주 어릴 때는 퇴근 후 새빨간 얼굴을 하고 방에 들어오셔서 나와 오빠를 끌어안고 한참 동안 눈물을 흘리셨던 적도 있다.

코끝에 훅 끼치던 알코올의 날카로운 향보다도 더 먼저 닿았던 것은, 겨울바람에 차게 식은 손과 모르는 사람들의 향이 밴 넥타이, 뻣뻣한 양복.


아빠는 힘들대.

너무너무 힘들대.


아빠에게는 꿈이 있었다.

그래, 한때 그림을 그리고 싶으셨댔어. 짧은 꿈이었지만.


그렇지만 아빠의 배경이 되어준 무대는 너무나도 가혹했고, 어떻게든 살기 위해 매달려야만 하는 세상이라, 당장 배를 곯지 않을 직업을 구하는 것이 먼저였다.

어쩌면 항상 안정을 찾아야 한다는 아빠는 가혹한 삶 속에서 '안정'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두실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삶에서 가장 중요하게 두는 가치는 어떤 삶을 살아왔는가에 따라 달라지겠지.

나의 중심은 결국 나의 행복이다. 넉넉한 재산으로 안정적인 삶을 사는 것도 행복이라 할 수 있겠지만, 우선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즐거움을 느끼고 성장을 하고 싶다.

어쩌면 몇 달, 몇 년 뒤에는 또다시 바뀌어 있을지도 모른다. 나도 어른들처럼 안정을 좇게 될지도. 

그렇지만 이 '즐거움'이라는 가치가 아직 꺼지지 않은 지금은 이것만을 위해 살고 싶다.


해볼 수 있을 만큼 해본 뒤에 생각해 봐도 늦지 않아.


딱 한 번, 딱 한 번의 삶에서 하고 싶은 일을 꺾어내야 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슬픈 일이니까.


목소리를 내어도 괜찮고, 하고 싶은 말을 마음껏 적어 내려가도 괜찮다고,


마음껏 삶을 그리고 새겨나가도 괜찮다고,


그렇게 내 편을 들어주려 한다.


괜찮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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