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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지원 Nov 18. 2024

어제의 나를 안고 살아가

 한때는 어제의 내가 사라진다고 생각했던 적이 있었다.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나는 많이 다르니까. 생각의 무늬도, 생각을 말로 그려내는 방식도.


그렇지만 나는 내 안에 여전히 쌓여서, 때때로 해결되지 않은 결핍을 이야기하며  머릿속의 바다에서 얼굴을 내놓곤 한다.


그 애는 숨을 쉬러 올라온다고 했다.


내 앞에 앉아서는 이루지 못했던 것을 줄줄이 늘어놓으며 품어왔던 파도로 나를 쓸어가다가 어느 순간 잠잠해지는 하루를 반복했었다.


그랬던 그 애가, 나를 사랑한다고 편지를 보내왔다.




 입학 전에 내게 썼던 편지를 이제야 읽어보았다.

열아홉 살의 나는 마치 시간에 쫓기는 것처럼 다급하게 사랑한다는 말을 몇 번이나 담아내었다. 곧 사라질 것만 같은 사람처럼, 지금이 아니면 안 된다는 듯이.


네가 사는 그 시간은 되돌아갈 수 없는 곳이지만,

그래도 너는 결국 나인걸.


평생 함께 살아가야 하는걸.


따갑고 아픈 말을 뱉던 그 애가 왜 사랑한다는 말을 그리도 많이 했는지는 모르겠다. 그 자리에 살아있어 줘서 고맙다는 말까지 할 정도로 삶에 대한 애착이 강한 사람이던가?

어쩌면 살아냄으로써 꼭 이루고 싶은 무언가가 있었을지도 모르지.


다만 그것을 정말 이뤄도 될지에 대한 확신이 없어서, 미리 날 선 말로 스스로를 보호하려 했던 걸지도 모른다.


가시 돋친 말은 결국 두려움이 세운 방패일 것이다.



몇 년을 불안정하게 보내다 나름대로 마음이 편안해질 만한 방법을 생각해 냈다.


말의 너머를 본다.


나의 말도, 남의 말도,

가시 돋친 말도, 부드러운 말도,


그 너머를 보고 얽힌 실을 풀어내어 의미를 찾는다.

과하면 좋지 않겠지만, 어느 정도는 필요하다.


말의 너머를 보는 것은 마음을 가라앉히는 것에 도움을 준다.


그리고 그 끝에서, 어제의 나는 사라지지 않는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내면의 어린아이는 결핍을 말하고, 불안을 말하고, 사랑을 말한다. 남에게 의지하는 것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스스로가 부모와 같은 사람이 될 수밖에는 없다.


나는 나의 어머니로 살아간다.

나는 나의 아버지로 살아간다.


내가 단단하면 남에게도 단단한 애정을 안겨줄 수 있다.


그러니 오늘의 나는 어제의 그 아이를 안고 살아간다.

어제의  너를,

어제의 나를 안고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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