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황

by 이지원

무엇부터 적어야 할지 감이 오지 않는다.


백지를 마주한 것이 참 오랜만이다. 글 밖의 삶을 사느라 바빴다는 핑계로 용서를 구하기에도 힘들 정도로 긴 시간이 흘렀다. 손가락을 따라 백지 위에 놓아지는 이 검은 글자도 참 오랜만이다. 낯설고 어색해 어떤 말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다. 멈춘 손만 망연히 내려다보고 있다.


깨달은 것을 적어보자면, 최근 들어 삶을 대하는 태도가 부쩍 달라졌다는 것을 느낀다. 몸 안으로 들어오는 공기가 전에 비해 더 차가워진 것을 깨달았을 때 즈음이었다. 나는 더 이상 죽겠다는 말을 함부로 입 안에 담지 않았고, 어떻게든 살겠다고 다짐했고, 남에게 매달리지 않기로 했다. 지나치게 생각하는 습관도 조금 거두어 보기로 했다. 이를 테면 한숨 하나에 과도하게 의미부여를 한다거나, 표정을 지나치게 살핀다거나 하는 것들 말이다. 가볍게 살아봐야지.


오래전에 애착유형을 알아본 적이 있다. 나의 애착유형은 불안과 회피를 동시에 지니고 있는 혼란형이었다. 나는 애착을 가진 상대가 떠날까 봐 불안해하면서도 지나치게 가까워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사람이었다. 떠날 것이 두려워 일부러 기대를 하지 않으려 했던 걸지도 모른다.


좀 더 시간이 지나서는 가족에게든 가까운 사람에게든 불안을 내보이는 것은 여러모로 좋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내보인 불안은 또 다른 불안을 낳았고 그것은 주변 사람을 지치게 했다.

내 불안은 나의 감정이고, 나는 이제 나를 달랠 수 있을 만큼 많이 자랐다. 불안이 가장 크게 치솟을 때 밖으로 흘러나오지 않도록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며 잘 가라앉히고 있다. 앓는 것도 괴로워하는 것도 아닌 달래는 상태인 것이다. 그리고 진정이 되어 이제 정말 밖으로 꺼내도 부담이 되지 않을 정도로 줄어들면 그때서야 이야기를 꺼낸다. 조금 힘들었다고.


사실 이런 방법이 맞는지는 잘 모르겠다. 누군가는 또 숨기지 말고 다 털어놓아야 좋은 것이라고 이야기하기도 하더라. 그러나 나는 남에게 걱정을 끼친다거나 부정적인 감정을 옮기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에 그 누구도 상처 입히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을 택했을 뿐이다. 그런데 모르겠어. 내게는 가장 좋다고 생각했던 방법이 남에게는 또 아닐지도 모르지.


불안이라는 것을 어느 정도로 털어놔야 적당한지, 그 범위를 잘 모르겠어서 과하게 통제하기도 한다. 한 방울을 흘려보내려다 그만 전부 다 내보내 버릴지도 모르니까. 그리고 그 뒤의 결과를 예상할 수가 없으니까. 내 불안은 어쩌면 약점이 되어 되돌아올지도 모른다. 어쩌면 실망하게 될지도. 혹은 어느 정도는 받아줄지도 모르지. 혹은 받아주기로 약속했던 사람이 지쳐 떠나갈지도 모른다.


아무튼 불안을 과하게 드러내고 내가 느낄 안정감을 지나치게 남에게 요구하는 사람이 되지는 말아야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안정감을 사람에게서 찾을 수도 있긴 하지만 그 외의 요소에서도 분명히 찾아낼 수 있을 테니까, 계속해서 나를 알아가는 시간을 가져야지. 그리고 좀 더 단단한 사람이 되어야지. 나뿐만이 아니라, 남도 잘 품을 수 있도록.

keyword
작가의 이전글휴재공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