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탑

by 이지원

고양이는 소녀를 언덕 아래로 데려갔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옷자락을 붙잡고 이끈다.

소녀의 발목은 아무렇게나 비틀거렸다. 겁을 먹고 눈을 질끈 감았다. 넘어질 것 같으면서도 넘어지지 않아 두려움은 갑절이 되었다. 발밑은 푹신했지만 따스하지 않았다. 무서웠다.


"어디, 어디로 가는 거야? 난 죽기 싫어!"


고양이가 고개를 돌려 소녀 쪽을 바라보았다.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흥, 소리를 내며.


"무슨 소리야, 이미 죽었으면서."

"아, 그랬지."


시큰둥한 고양이의 말에 소녀는 다시금 깨달으며 감았던 눈을 도로 떴다. 이제는 완전히 평지에 다다랐다. 자석처럼 몸을 끌어당기던 힘은 평지를 밟으니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방금 그건 뭐였지? 누가 세게 잡아당기는 것 같았어."


고양이는 대꾸하지 않고 평지를 계속 걸었다. 잔디가 완전히 사라지고 흙바닥이 보일 때까지. 질척 질척한 진흙이 발에 엉겨 붙을 때까지. 더 이상 걷기 힘들 만큼 질퍽한 곳을 발견하고 나서야 멈춰 섰다. 소녀는 여전히 알 수 없는 고양이의 행동에 의문만 커질 뿐이었다.


고양이는 옆에 나란히 선 소녀를 바라보았다.


"땅에 손을 대 봐."


"여기에?"



소녀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이제는 춥지도 않았지만 단지 겁이 났다. 이제 처음 만난 고양이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따르는 것이 무섭기도 했다. 고양이는 어떤 말도 없이 소녀만을 지켜보고 있었다.


고민 끝에 소녀는 천천히 땅에 엎드렸다. 진흙이 양 무릎을 집어삼켰다. 그러나 어떤 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소녀는 자신이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했다.


소녀는 손끝을 바라보았다. 땅에 손을 댈까 말까 망설이던 순간, 진흙 위로 작은 물결이 일렁거리는 것을 보았다. 무언가가 소녀의 손을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거... 꼭 해야 돼?"


소녀는 땅 밑의 무언가가 듣지 못하도록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그러나 고양이는 아무 대답 없이 그녀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의 눈빛 속에는 채근도, 강요도 없었다.


떨리는 숨을 내쉬며 조심스럽게 손을 진흙 위로 가져갔다. 차갑지도 축축하지도 않았지만 몸이 본능적으로 움츠러들었다.


"싫어... 그냥 안 할래."


그녀는 진흙에서 손을 떼고 몸을 일으키려 했다.


그 순간, 진흙 속에서 희미하게 부모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딸, 괜찮아."


이제는 뛰지도 않는 심장 안에 아련한 목소리가 흘러들어왔다. 너무나도 멀게 느껴졌던 목소리. 퍼뜩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뜨던 소녀는 고개를 숙인 채 숨죽여 눈물을 흘렸다.



"이건 너의 기억이야."


고양이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두 사람을 잊지 않기 위해 마음 안에 묻어둔 기억."


소녀는 눈물을 잔뜩 머금어 먹먹해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너무 아팠어, 자꾸 떠올라서..."


"온 집안에 엄마랑 아빠가 있는 것 같아. 금방이라도 돌아오실 것 같은데... 아무리 불러도 오지를 않아..."


소녀가 쓸어낸 축축한 진흙 위에 온기 없는 눈물방울이 떨어졌다. 소녀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하고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소녀를 지켜보던 고양이가 입을 열었다.


"기억을 열어야만 찾을 수 있어."


밤바람이 불어와 고양이의 털이 부드럽게 흔들렸다.

소녀는 아직 눈물이 채 떠나지도 않은 얼굴로 고양이의 눈을 바라보았다.

푸르게 빛나는 그의 눈은 끝나지 않는 밤을 밝히고 있었다.




땅이 울리기 시작했다. 진흙이 조금씩 튀어 올랐다.


"봐, 네 마음이 널 기다리고 있어."


소녀는 다시 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두려움 속에서도 단단히 마음을 먹었다. 손바닥이 진흙을 짓누르자 땅울림은 더욱 강해졌다. 거대한 짐승이 으르렁거리는 것만 같았다.


소녀는 두 손으로 바닥을 짚으며 간신히 중심을 잡았으나 왼팔이 자꾸만 진흙 속에 빠져들었다. 버둥거리고 잡아당겨도 소용이 없었다. 두려움에 삼켜지던 그때, 진흙 속에 파묻혀 있는 손에 무언가가 닿았다. 다른 것의 감촉은 제대로 느낄 수 없었지만 그것의 감촉만은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차가운 금속의 감촉.

소녀는 그것이 톱니바퀴일 것이라고, 저도 모르게 생각했다.


날카로운 금속 마찰음이 귀를 울리며 진흙 속에서 낡은 톱니바퀴가 모습을 드러냈다.


톱니바퀴를 이루고 있는 것은 단순한 금속이 아니었다. 소녀의 기억, 마지막으로 보았던 부모님이 마치 유리파편처럼 튀어 올랐다 사라졌다.

톱니가 돌아가기 시작하자, 진흙 속에서 무언가가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흐릿하던 그것은 점차 제대로 된 모양을 갖춰 나갔다. 시계탑이었다.


기둥은 겉보기엔 견고해 보였으나 이곳저곳 흠집이 나고 부식이 되어 있었다. 흰색과 푸른색이 섞여 있었으나 너무나도 오래되었기에 본래의 우아함은 찾아볼 수 없었다. 군데군데 금속이 녹슨 흔적이 남아있어 으스스한 느낌마저 주었다. 시계의 틀은 깨지고, 그 사이로 칙칙한 그림자가 스며들었다. 한때 짧은 움직임으로 시간을 알려주었을 시곗바늘은 멈추어 있었다.


어두운 세상 속에서 시계탑은 그 자리를 묵묵히 지키고 있었다.


별빛이 시계탑의 꼭대기에 걸려 있었다.


어서 들어오라고 손짓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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