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니는 저 길은 늘 죽음이 다른 죽음을 찾아 떠나곤 한다.
나는 그 죽음의 개별성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그저 늘 저곳에 누군가의 삶의 끝이 있구나 생각할 따름이다.
죽음이 초라하든 화려하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다.
죽음은 이 생에 남은 그 어떤 것에도 의미가 없다.
일반 상조회 버스를 타든 근사한 리무진을 타든 죽은 이가 타는 곳은 역시 짐칸일 뿐이다.
숨이 끊어지는 순간부터 죽은 자는 더 이상 산 사람의 자리에 앉을 수가 없다.
죽음이 들고 난 자리에는 그 죽음에 기댄 치열한 삶이 있다.
어떤 사람은 그 죽음에 기대 또 다른 삶을 살아간다.
어쩌면 나도 그 사람들 중의 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매일 죽은 자들이 들고 나는 공간에 수많은 조화들이 들고 난다.
매일 죽은 자들이 들고 나는 공간에 수많은 장례용품들이 들고 난다.
살아있는 사람들은 그 죽은 사람들에 매달려 자신의 삶을 연명해 가고 있다.
(장례문화에 들어가는 비용은 생각보다 작지 않다.)
내가 일하는 병원에는 하루에도 1~3번 '코드블루' 방송이 다급하게 스피커를 통해 터져 나온다.
(나는 의료진은 아니다. 그럼 넌 뭐냐? 병원에는 의료진 외에도 다양한 직종의 사람들이 근무한다)
그 순간 누군가의 삶과 죽음이 판가름 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하는 그 모든 일이 일어나지만 대부분의 삶은 일상적이다
매일 만나는 죽음 앞에서도 이곳에 사는 사람들의 시간은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다.
오늘 할 일을 걱정하고, 내일의 발걸음이 틀림없이 무거울 것임에 절망한다.
(20년 동안 출근하면서 단 하루도 가벼운 적이 없었다.)
매우 가까운 곳에서 삶을 마감하는 누군가가 있음에도
지금 이 순간 나의 절망적인 죽음이 훨씬 더 무겁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