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현대과학보다도
철학은 멀리서 보면 따분하다.
자본주의, 그리고 최첨단 과학이
극도로 발달한 현대사회에서
철학이 개인의 삶에 가져다주는 효용은
작아 보이며, 실용성이 없어 보인다.
공학이나 자연과학에 비하면
철학은 크게 쓸모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산업혁명과 공학의 발전은
우리가 서울에서 부산까지,
한국에서 미국까지 자유롭게
이동할 수 있게 해 주었다.
한 뼘 정도 크기밖에 되지 않는
네모난 모양의 스마트폰이라는 기계는
우리 삶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그 기계덕에 우리는
다른 대륙에 살고 있는 타인과 소통할 수 있고
오늘 하루의 일정을 시간대별로
미리 정리할 수 있고
아침에 늦잠을 자지 않을 수 있다.
자연과학의 발전은
우리가 작은 알약 하나만 먹어도
우리 삶을 위협하는 바이러스로부터
우리 몸을 보호할 수 있게 해 주며,
건강한 영양소들로 가득 찬 음식들을 제공했다.
이 모든 것들은 우리의 생존과 직결되어 있다.
하지만 철학은 어떠한가?
'나는 왜 살아가는가'
'나를 죽지 않고 살아가게끔 하는 동기는 무엇인가'
'고통은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가' 따위의 질문에 대해
고찰하는 행위는 누군가에게는 사치스러운 행위이다.
당장 입을 옷과 먹을 식량이 걱정인데
골방에서 뜬구름 잡는 이야기만 한들
그들에게 그것이 대체 무슨 소용이겠는가?
하지만, 생존을 위한 기본적인 욕구들이
충족되고 나서부터는 또 다른 문제가 시작된다.
진정한 고통은 그 이후에 시작된다.
당장 내일의 생사를 걱정해야 하는 극빈민층이 아닌
더 많은 보편적인 사람들을 괴롭히는 문제들은
그리 단순하지 않다.
그들은 배고파서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며,
추워서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다.
사람들을 자살하게 하는 문제는
배고픔과 추위가 아니다.
오히려 우울증과 자기혐오와
자기 연민과 무기력증 따위의 것들이다.
살아가야할 이유와 동기의 부재이며,
무엇을 위해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목적의식과 자기효능감의 부재이다.
공학과 자연과학은
배고픔과 추위는 손쉽게 해결해 준다.
매슬로우가 말한 생리적 욕구를
지나치게 과잉충족 시켜줄 뿐이다.
물론 그 욕구들은 가장 근본적이고
기초적이기에, 반드시 필요한 부분이다.
하지만, 그것들은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에 대한
대답을 해주진 못한다.
‘같은 하루하루가 반복되는 요즘, 대체 내가 뭘 위해, 누굴 위해 이렇게 사는지 모르겠는데, 어떻게 하지?‘
'직장 상사가 너무 힘들게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
'정말 사랑하는 사람과 이별했는데, 이 고통과 슬픔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까?'
'어머니를 사별하고 나서 마음이 너무 힘든데, 어떻게 다시 일상생활을 할 수 있을까?'
'요즘에 번아웃이 온 것 같은데, 어떻게 이 무기력함을 극복할 수 있을까?'
따위의 질문에 명쾌한 대답을 해주지 못한다.
위의 예시들은 우리가 살아가면서
반드시 마주할 상황들이고,
동시에 우리를 가장 힘들고 고통스럽게 하는 질문들이다.
그렇기에 생각해 볼 필요가 충분히 있는 질문들이다.
철학은 고리타분하고 거창한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일상에서 무수히 마주하는
위와 같은 질문들에 대해 생각해 보고
각각의 상황에 대해 접근하고
해결해 보는 시도 자체가 철학이다.
소크라테스가 누군지 모르는 사람도
알고 보면 누구보다 현명한 철학자일 수 있다.
철학은 한 사람이 살아가는 태도 그 자체이다.
우리가 교과서나 책으로 접한
저명한 철학자들은 그 삶의 태도를
글이라는 매개체를 통해
잘 풀어낸 사람들일 뿐이다.
그들은 우리가 일상에서 겪는 다양한 고민과 상황,
고통과 삶 그 자체에 대해 우리보다 먼저 고민해 보았고,
더 오랜 시간 깊이 고찰해 보았을 뿐이다.
그들이 그 깊은 고찰들을 글을 통해 후세에 전달했기에
우리가 취할 수 있는 삶의 태도의 선택권이 넓어진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의 글은 가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병원에 가는 이유는
적어도 병에 대해서는
우리보다 한평생을 병에 대해 연구한
의사들의 판단을 믿기 때문이다.
우리가 굳이 유명한 한식 전문점을 가는 이유는
적어도 한식만큼은 우리가 집에서 한 요리보다는
한평생을 한식을 연구한 셰프의 요리가
더 훌륭할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우리가 헬스 트레이너에게 운동 지도를 받는 이유도
마찬가지이다. 굳이 몸을 다쳐가면서 스스로 배울 수도
있지만, 한평생 운동을 연구한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는 것이 더 효율적이고, 부상의 가능성을 줄이고
더 좋은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철학자들은 한평생을
'어떤 태도로 삶을 살아갈 것인가'에 대해
연구한 사람들이다. 물론, 그 누구도
감히 누군가의 삶에 대한 정답을 말해줄 수 없다.
뻔한 이야기지만,
삶과 철학에 정답이라는 것은 없다.
모두가 다른 정답을 이야기를 한다.
같은 한식 전문가라도
요리를 하는 방법이 천차만별이고
똑같은 헬스 트레이너라도 운동하는 방식은
너무나도 다양하다.
각자에 맞는 방법이 있을 뿐이다.
수많은 철학자들이 우리에게 딱 맞는
정답을 알려줄 수는 없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상당한 선택권을 준다.
선택의 폭을 놀라울 정도로 넓혀준다.
그들이 한평생을 삶에 대해 연구한
결과물을 보고 우리는 우리 삶에 맞게,
우리 입맛에 맞게 조리하면 그만이다.
장자는 오래 만난 애인과 헤어졌을 때
어떻게 덜 힘들 수 있는지에 대해 말한 적이 없다.
하지만, 누군가는 나름의 방식대로 장자의 철학을
받아들여서, 그것을 통해 오랜 연인과의 이별에도
상대적으로 초연하게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니체는 좋은 회사에 입사하는 방법에 대해
단 한 마디도 말한 적이 없다.
하지만, 누군가는 나름의 방식대로
니체의 철학을 받아들여서 좋은 회사에 입사하고,
더 좋은 회사로 이직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철학은 살아가며 마주하게 될
수많은 선택의 순간들에서,
어떤 선택을 내릴 것인지에 대해
주관적이지만 명확한 기준을 제시한다.
자신만의 확고한 철학을 가진 사람은
철제로 된 갑옷을 두른 듯,
크게 두려울 것이 없다.
어떠한 고통에도 묵묵히 견딜 수 있다.
자신만의 철학을 가진 사람은
후회하지 않을 수 있다.
자신의 선택에 대한 깊은 믿음이 있다면
지나간 일에 대한 미련은 남을지언정,
결코 후회하지 않는다.
모든 선택은 후회를 낳기 때문이다.
지금 후회하고 있는 멍청한 선택을 하지 않고
다른 선택을 했더라도
결국 그곳에는 또 다른 차원의 후회가
왜 이제야 왔냐며, 손을 흔들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철학은
세간의 시끄러운 소음과 돌풍 그 한 가운데에서도
굳건히 몸의 중심을 잡을 수 있게 해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