쇼펜하우어의 철학에 열광하는 우리들
인간이 느낄 수 있는 감정 중, 가장 고차원적인 고통을 통감하게 하는 것은 다른 것보다도 ‘외로움’이 아닐까 싶다. 극한의 분노는 한순간에 불타올랐다가도 금방 사라진다. 사무치게 슬픈 감정도 역시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결국 언제 그랬냐는 듯 사라진다. 우리는 신체적인 고통은 충분히 참을 수 있다. 살면서 뇌가 받아들일 수 있는 고통의 역치를 넘어서 쇼크가 와서 기절하는 경우는 한 사람의 인생에서 일어날 가능성이 거의 없다.
그런데 외로움은 앞서 언급한 감정들과는 결이 조금 다르다. 외로움은 파괴적이며, 지속적이고, 뒤끝이 있다. 외로움은 인간이라는 한 개체를 서서히, 그리고 아주 고통스럽게 죽일 수 있을 정도로 파괴적이다. 그렇다면 왜 우리 인간들은 유독 외로움에 취약할까? 왜 우리는 꼭 누군가와 더불어 살아가야만 할까? 말 그대로 ‘혼자’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사는 방법은 과연 없을까?
요즘 한국의 젊은이들은 쇼펜하우어에 열광한다. 어둡고 염세주의적이고 비관적이지만, 그의 철학은 분명히 진실에 가까운 인간 본성에 대한 무언가를 밝힌다는 점에서 가치가 크다. 하지만, 우리 중 대부분은 쇼펜하우어 같은 삶을 살라면 그러고 싶지 않을 것이다. 그의 삶은 외로움과 우울증과 자살시도로 가득하며, 인간관계도 좋지 않았다. 그 누가 그런 외롭고 고통스러운 삶을 살고 싶을까?
가끔 보면, 우리는 마치 인간관계에 대한 두려움을 도피하려는 수단으로 ‘난 혼자서도 괜찮아’라고 스스로 외치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우린 스스로 알고 있다. (그것이 말 그대로 ‘혼자’라면) 우리는 전혀 괜찮지 않다는 것을. 물론, 자신의 가치관이나 신념, 자존심과 삶의 태도를 너무 많이 타협하면서까지 모든 주변 사람들과 관계를 유지할 필요는 없다. 사회학자와 심리학자들은 인간이 살아가면서 유지할 수 있는 친구의 ‘최대’ 숫자는 150명 정도이고(던바의 수), ‘진정한 친구’로 분류할 수 있는 숫자는 평균적으로 10-15명 정도라고 한다.
인간관계는 어렵다. 누가 제대로 알려주지도 않을뿐더러, 누군가가 명쾌하게 알려준다고 해도 그것이 내게는 정답이 아닐 확률이 너무 높다. 하지만, 분명히 우리는 그것을 필요로 한다. 우리는 항상 사람이 고프고, 집단에서 고립될까 봐 두렵다.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우리의 몸은 그렇게 설계되어 있다. 누군가가 학교나 회사에서 철저한 아웃사이더이지만 정서적으로 안정되어 보인다면, 그 사람은 ‘혼자’서도 충분히 행복하게 잘 살아가는 사람이어서가 아니다. 그 사람은 분명히 학교나 회사라는 집단이 아닌 다른 곳에서 건강한 인간관계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1~2명의 친구이든, 가정이든, 사회적 모임이든 말이다.
호모 사피엔스를 지구에서 최상위 포식자로 만든 것은 바로 ‘화합하는 능력’이다. 네안데르탈인은 현생 인류인 호모 사피엔스보다 크고 물리적으로 강했다. 그런데 결국 그들은 멸종했다. 인간 개개인은 자연에서 극도로 나약하다. 당장 현대인 중 한 명을 골라서 자연에 내던져 놓으면 몇 달을 못 버틸 것이다. 아프리카 초원까지 가지 않아도 된다. 동네 뒷산에만 가져다 놓아도 몇 시간 만에 저체온증으로 끙끙 앓다가 몇 주 내로 목숨을 잃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처음 본 사람이라도 신뢰할 수 있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상상하여 화합할 수 있고, 집단지성을 형성할 수 있다. 지구상에 어떤 생물도 하지 못하는 것들이다. 즉, 우리 인류를 생존할 수 있게 한 모든 것들은 결국, ‘타인과의 관계’가 전제되어야 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이 사실은 현대 인류에게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것이며, 수백 년 수천 년이 지난 미래에도 그럴 것이다. 즉, 인류에게 있어 사회적 고립은 종의 멸종을 의미한다. 한 개체의 죽음 정도의 수준이 아닌, 종 전체의 존속 여부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소인 것이다.
사회적 능력이 극도로 떨어져서 집단에서 (사랑받지 못하는 수준이 아닌) 배척되는 개체들은 결국 죽음을 피할 수 없었다. 이것은 지금도 그럴 것이다. 즉, 더불어 살아갈 수 있는 최소한의 사회적 능력을 갖춘 개체들만이 자연선택되었고, 우리는 그 조상들의 멋진 결과물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유전자 속에는 집단에서 도태되지 않으려는 성질들이 뿌리 깊게 박혀있다. 결과론적으로 그것이 생존에 유리하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집단에서 도태되는 것에 어느 정도 민감한 조상들만이 살아남았고, 우린 그들의 자손들이기 때문에 외로움이라는 감정을 유독 고통스러워하고 두려워하는 것 같다. 사람들이 작은 점으로 보일 정도로 높은 곳에서도 두려움을 느끼지 못하거나, 뜨거운 물체를 몸에 갖다 대어도 고통을 느끼지 못한다면, 그 조상들은 결국 오래 살아남지 못해 많은 자손들을 남기지 못했을 것이고, 그렇기 때문에 우리 주변에서 그런 사람들은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즉, 사회적 고립은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것만큼이나, 혹은 그보다도 더 크게, 한 개체의 생존을 가르는 문제였던 것이다.
외로움에 대처하는 방법에 있어서도 이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일단, 우리 인류는, 나 자신은 그런 존재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나는 외로워도 괜찮아. 진정한 친구가 단 한 명도 없어도 괜찮아’라고 스스로에게 암시하며 쇼펜하우어의 철학을 도피의 수단으로 자신에게 유리한 방식으로만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것은 전혀 도움 되지 않을뿐더러, 상황을 악화시킨다. 시간을 지연시킬 뿐이다. 그러한 태도를 일관하며 살아간다면, 결국 더 큰 고통이 따라올 뿐이다. 폭탄은 언젠가 터지고 만다.
그리고 또 중요한 것은, 뻔한 말이지만 모든 이에게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기억해야 할 것은, 최선을 다할 필요가 없는 것이 아니라, 최선을 다하지 않아야만 한다. 우리가 인간관계에 들일 수 있는 시간과 에너지 총량은 제한적이다. 만약 자신이 속한 여러 개의 집단 중에 아무리 노력해도 겉도는 집단이 있다면, 그 집단에서는 ‘배척’되지 않을 정도의 사회성만을 발휘하는 것이 좋다. 그 집단은 다양할 수 있다. 회사가 될 수도, 학교가 될 수도, 학교 안에서도 같은 과 사람들일 수도, 동아리일 수도 있고, 심지어 그 집단이 가족이 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 삶에서 딱 한 집단만큼은 그 집단을 구성하는 사람이 많든 적든 간에 반드시 필요하다. 그런 집단이 단 한 개도 없다면, 진정으로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고 무엇이 그렇게 만들었는지를 분석해 보고 변화해야 할 필요가 있다. 무리에 소속되지 못하고 겉도는 기분은 참 씁쓸하다. 어느 집단에 가도 잘 적응하고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사람들도 더러 있긴 하다. 그것은 천부적인 재능이며, 축복이다. 함부로 그들을 모방하려 하지 않는 것이 좋다. 박탈감만 들뿐이다. 각자가 가진 탤런트가 있듯, 우리는 그들이 가지지 못한 다른 강점이 분명히 존재하지 않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