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없이 걷다가 잠시 멈춰 선다.
그간 쌓아왔던 것들을 위에서부터 아래로,
천천히 훑어본다.
여러 가지 모양의 발자국들이 보인다.
길고 긴 여정을 함께했던
찢기고, 구멍 나고, 닳고 닳아버린,
해진 신발의 흔적들이 보인다.
무엇을 위해 그리 정신없이 살아왔던가.
꽉 막힌 듯 보이는 철저한 규율과 규칙들은,
그간 누굴 위한 것이었던가.
그것은 어떤 결핍으로부터의 발버둥이었던가.
이 두꺼운 가면을 벗어던진 채로,
얼굴에 느껴지는 부드럽고 시원한 바람을
온전히 맞아본 적은 언제였던가.
그간 무엇으로부터 도망치고 싶었던 것인가.
무엇이 그리 두려웠던가.
가끔은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 충분하다는 사실을,
언제부터 망각하고 있었던 것일까.
아이들을 보면, 그저 이 세상에 존재한다.
노인들을 보면, 그저 이 세상에 존재한다.
짐승들을 보면, 그저 이 세상에 존재한다.
그들은 그 자체로 온전함을 느낀다.
세월의 때를 몸에 묻혀가며,
우리는 가끔 그저 존재하는 법을 망각하곤 한다.
이 발자국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존재한다.
그러나 그 흔적들은 종종 내게 목줄을 채운다.
가끔은 촘촘히 짜인 이 설계도에서
멀리 벗어나보고 싶다.
세상은 내게 그런 그림을 그려준 적이 없다.
그것은 단지 나의 해석이며,
내 우주의 표상일 뿐이다.
한 방향으로 치우쳐진 삶은
언제나 비극의 씨앗이 되고 만다.
타성에 젖어 그저 앞으로만 나아간다면,
언젠가는,
그곳이 앞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후회의 고통이
온몸을 집어삼킬 것이다.
후회스러운 삶을 살고 싶지 않다.
매 순간 결핍과 두려움과 방어기제 뒤에 숨지 않고,
상처받을 각오를 다지고 당당히 맞서고 싶다.
적어도 어떤 순간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내비치고 싶다.
적어도 그 순간만큼은,
단 한 점의 후회도 이 발걸음 뒤에 남기고 싶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