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 노인들은 정말 불쌍한 존재들일까?
문득 '망각'이라는 것은
신이 인간에게 준 가장 큰 선물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사랑하는 사랑과의 이별도,
부모의 죽음도 결국 언젠가 서서히 잊힌다.
평생 지워지지 않을 것 같은 상처도,
시간이 지나고 보면
결국 아무렇지 않게 아물어있다.
생각은 많은 경우 우리를 괴롭게 하지만,
망각은 많은 경우 우리를 고통으로부터 해방시켜 준다.
망각은 진정한 의미의 자유를 우리에게 안겨준다.
어릴 적 우리 할머니는 치매에 걸리셨었다.
초등학교, 중학교를 다닐 적이었다.
일요일이면 우리 가족은 아버지의 손을 잡고,
할머니가 계신 요양병원에 갔다.
병원의 냄새는 좋지 않았다.
오래된 저염 급식 냄새와
불쾌한 화학약품 냄새가 섞여
온 공기을 뒤덮었다.
특히 요양병원은 죽음과 우울의 에너지가 가득했다.
그런데 정작 입원하신 우리 할머니는 행복해 보였다.
참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할머니 옆 자리에 입원하신
팔자 주름이 유달리 깊은 다른 할머니도 마찬가지였다.
어릴 적의 나는 생각했다.
‘정작 입원한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아무 생각 없이
행복해 보이는데, 왜 이 병원은 죽음과 우울의 에너지로
뒤덮여있을까?’
가만히 보면,
그 에너지는 병동에 입원한 환자들인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것이 아니었다.
병원에서 일하시는 의사, 간호사와
내방객들, 그리고 환자의 가족들의 것이었다.
그들의 눈에는 생기와 확신이 없었다.
적어도 내가 본 그곳에선 그랬다.
웃는 듯 보이지만
눈가 어딘가에는 슬픔이 묻어있었다.
의사와 간호사들은 지치고 피곤해 보였다.
하지만 할머니들은 달랐다.
왜 음악방송을 보고 있는데
마음대로 채널을 돌리냐며
언성을 높이며 유치하게,
마치 어린아이처럼 싸우는 할머니들은
정작 별 생각이 없어 보였다.
별 생각이 없는 상태는
불교에서 일컫는 ‘무아’의 상태이다.
불자들은 그 상태에 이르기 위해
수많은 마음수련을 거친다.
'참 나'를 찾기 위한 과정에는
반드시 그 상태가 수반된다.
어찌 됐든 중요한 건,
사람들은 그들을 동정하지만,
정작 우리 할머니는 행복해 보였다.
물론 가족들의 어깨는 무거울 것이다.
요양병원 입원 비용은 만만치 않은데
그 비용은 누가 부담해야 할 것이며,
왜 나는 이렇게 어머니를 챙기는데
너는 왜 그러지 못하냐며
형제자매 간의 갈등이 생길 수도 있다.
생각보다 많은 경우,
이 갈등은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을 때
당신이 세상에 남기고 간 현금이나 부동산을
어떻게 배분할 것인가에 대한
지분 확보 싸움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러한 물질적인 동기가 아니더라도
몇몇은 할머니를 진정으로 위하는 마음보다는
스스로의 죄책감을 털어내고 싶은 마음이 더 클 것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셨을 때의 죄책감과
그때 자신이 느낄 동정과 슬픔에 대한
면죄부를 미리 받아놓고 싶은 것일 수도 있다.
사실 정작 할머니는 치매에 걸린 후
세상을 뜨고 자유로운 영혼이 되시기까지
행복하셨을 것이다.
별생각 없는 상태야말로
행복의 끝에 있는 지점이기 때문이다.
그 기간 동안 할머니는
무의미한 세간의 시끄러운 소음을 초월한
철학자였고, 현자였고, 성인이었다.
그 병원에 있는 다른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마찬가지였다.
왜 인간의 신체는 명이 다할 때쯤이 되면
나이를 먹을수록 더 성숙한 어른이 아닌
어린아이처럼 되돌아가도록 설계되어 있는가?
왜 20살에서 40살이 되기까지는
성숙해지며 무언가가 채워지지만,
80살에서 100살이 되기까지는
치매가 걸려 아이처럼 어려지며
되려 삶에서 무언가가 비워지는가?
이 또한 만약 신이 있다면, 신이 의도한 것일까?
그동안 시끄럽고 정신없던 속세의 삶으로 인해
고통받았던 상처들을, 적어도 세상을 뜨기 직전에는
치유해주고자 한 것일 수 있겠다.
그제야 진정한 의미의 자유를
선물해 주는 것일 수 있겠다.
강아지나 아이를 볼 때면 아무런 생각이 없이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과 비슷하게,
노인들을 볼 때도 나는
알 수 없는 편안함과 안정감을 느낀다.
그들의 공통점은 별다른 욕심이 없다는 것이다.
말이나 행동에 어떠한 의도가 크게 없다는 것이다.
그저 그들은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면
그 자체로 행복하다.
스스로 행복한 상태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할 정도로 행복한 상태이다.
어린아이는 신이라는 누군가의 말처럼,
노인은 신이 아닐까?
모습을 달리하고 있을 뿐.
아무 생각 없이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며
낮잠을 자는 3살 아이와
치매에 걸려 매번 갈 때마다
맑고 순수한 미소를 머금으며
‘너는 누구냐’고 말하시던
82세 우리 할머니와의 본질적인 차이는
나이라는 숫자밖에 없었다.
나이라는 것은 지구의 공전 주기를 고려해
인간이 편의상 설정해 놓은 추상적인 개념이다.
많은 사람들은 그러한 추상적인 개념을
가끔 과대해석하며 의미부여를 한다.
사실 정말 아무것도 아니라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나이일 텐데.
나는 항상 본질적인 것을 생각하고자 한다.
나이는 허구이고, 영혼은 본질이다.
할머니와 아이의 영혼은
본질적으로 큰 차이가 없다.
누구나 할머니나 할아버지 혹은 어머니나 아버지가
치매에 걸리시는 날은 언젠가 올 것이다.
오만한 사람들은 그들을 동정할 것이다.
하지만, 사실 동정을 받아야 할 것은
망각이라는 자유를 얻지 못한 채
세상에 남겨진 우리들이다.
그들은 진정한 의미의 자유를 얻은 이들이다.
그동안 우리보다 오랜 세월 동안
속세의 고통을 느껴왔던 것에 대한
신의 마지막 선물일지도 모른다.
그 과정은 고통의 끈을 놓고,
자유로운 영혼이 되어
육체를 자연에 남기고 떠나는
너무나도 성스럽고 축복스러우며
감사한 일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