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하루꽃

02. 새벽-미안未安

by 책날 백대백

거실로 나와 정수기에서 차가운 냉수를 종이컵에 따라 마셨다. 그리고 다시 뜨거운 물과 차가운 물을 반반 섞어 방으로 돌아왔다. 거실에서 안방까지 몇 걸음도 안 되는 거리인데도 한 발짝 내디딜 때마다 허리가 끊어질 듯 아프다. 허리의 통증은 왼쪽뒷다리까지 마치 전선껍질 벗겨진 헤어드라이기를 잘못 만졌을 때 전기가 통했던 것처럼 깜짝 놀랄 정도로 찌릿하다. 척추관협착증이라고 하는데 척추뼈사이가 좁아져 신경이 지나는 구멍이 수도관에 석회 낀 것처럼 변해서 신경이 눌려 그렇단다. 허리가 아픈데 다리까지 저릴 건 뭐람.. 다리만 저리지 않아도 살 것 같은데 이놈의 허리병이 원래 이렇다고 얼마 전에 갔던 정형외과 선생이 설명해 주었지.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이러지 않았던 것 같은데 다리와 허리가 내 몸 같지 않다. 팔십여 년을 묵묵히 버텨온 몸뚱이가 이제 더 이상 못 참겠다고 하던 일을 멈춰버린 것 같다. 아침 일찍 병원에 가서 뼈주사라도 맞아야 며칠을 버티지. 들고 들어온 물과 함께 한 움큼의 알약을 입에 털어 넣는다. 심장병약에 당뇨약에 혈압약에 해가 갈수록 약이 주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수가 늘어나니 그렇게 늘어난 알약이 이제 한 손 가득이다.


약 먹은 컵을 내려놓고 동시에 한쪽손이 머리맡에 있는 TV리모컨을 더듬어 찾아 버튼을 누른다. 마치 내 팔이 하나의 다른 생명체처럼 자기 마음대로 움직이는 것 같다. 오랜 습관 때문이겠지. 새벽의 적막함이 어느새 다양한 음성과 여러 가지 소리로 채워진다. 이 새벽에도 홈쇼핑에서는 물건을 파느라 사람들이 분주하다. 여성속옷이 어쩠다던가 화장품이 어쨌다던가 TV에 나오는 여자들은 하나같이 꽃 같다. 탱그러운 그녀들과 대조적으로 구겨진 종잇장 같은 내손은 무심히 채널을 돌린다.


"북아메리카에 서식하는 그리즐리 베어, 우리말로 회색곰은 라틴어 학명으로 '우르서스 악토스 호우리빌리스'로 '무시무시한 큰 곰'이라고 합니다. 가장 큰 야생회색곰은 칠백킬로그램에 달하고 식물의 열매와 뿌리, 곤충 그리고 물고기 등 거의 모든 생물을 먹는 잡식성 동물입니다."

"오늘의 날씨는 대체로 맑고 최고기온 28도로..."

"장수옥침대는 별이별이...."

나의 시선은 어디 하나에 고정되지 못하고 채널을 아무 생각 없이 돌려댄다.


아참 내가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다. 아침에 수녀님이 온다고 했으니 된장찌개를 끓여야 한다.

수녀님은 가끔 집에 와서 집안 청소를 한다.

내가 하는 음식 중에 된장찌개가 제일 맛있다고 하는 데레사 수녀님.

내 큰딸 선희는 실업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보험회사에 들어갔다. 그러다가 선희아버지가 뇌출혈로 쓰러졌을 때 어린 동생들도 돌보고 생활비도 보태고 힘들어하던 나를 위로했다. 그런 선희가 없었다면 나는 그때 주저앉았을지 모르겠다. 남편이 반신불수로 십 년 만에 세상을 떠나고 동생들도 제 앞가림을 할 때쯤 선희는 수녀가 되겠다고 말했다. 하늘이 무너지는 마음이 그런 것이었을까 남편이 병으로 쓰러졌을 때도 그러지 않았는데 선희가 수녀가 된다니 어미로서 변변히 해준 게 없다는 미안함과 옆에서 든든히 나를 지켜주던 버팀목이 사라진다는 허전함이 교차하며 나는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었다. 그러면서도 선희의 결심을 되돌릴 용기가 나에게는 없었다. 가슴이 찢어지고 말리고 싶었지만 그동안 자기뜻 없이 살아온 그 애를 위해서 그 애의 선택에 말없이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