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맛은 어디서 왔을까

쑥 버무리의 추억

by 홍정임

오월의 거리가 온통 하얗다. 봄의 끝자락에서 겨우내 미처 빠져나가지 못한 송이눈이 쏟아졌나 보다.

20250512_092804.jpg

봄볕이 완연히 깊어 갈수록 도로변 초록 잎에서 실타래 같은 뭉치들이 솟아올랐다. 차창 밖은 흰 꽃물결로 넘실댄다. 보는 마음도 따라서 울렁인다. 모든 걸 내팽개치고 어디론가 떠나야 할 것 같다.

천변길 근처에 사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안부보다는 이팝나무가 얼마나 피었는지 먼저 물었다. 얼추 다 피었다고 한다. 이번 주 지나면 없다고 하길래 얼른 전화를 마무리하고 서둘러 천변길로 나섰다.

이팝나무의 어원에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흰쌀밥인 이밥이 이팝으로 변했다는 설과 절기 중 입하에 꽃이 핀다고 하여 입하 나무로 불리다 이팝나무로 변했다는 설이다. 고봉에 담긴 하얀 쌀밥을 연상한 건 배고팠던 시절 시대상을 반영한 것 같아 마음이 저려온다.

요즘처럼 먹거리가 넘쳐나는 풍족의 시대에 이팝나무를 보면 사람들은 어떤 걸 먼저 떠 올릴까. 적어도 쌀밥은 아닐 것이다. 건강을 생각해 요즘엔 쌀밥은 뒷전이고 잡곡밥을 더 선호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흰색을 대변하는 말이 뭐가 있을까. 솜뭉치, 눈꽃, 소금, 구름, 솜 사탕...... 그중 이팝나무는 눈꽃과 잘 어울린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눈꽃나무라 불린다고 한다.

당진 천변길에 줄지어 늘어선 이팝나무가 눈부시다. 성미 급한 놈은 미리 만개했고 느긋한 놈은 이제 한 번 펴 볼까, 하며 반쯤 기지개를 켠 상태다. 가까이 다가가 유심히 살펴보니 실 같은 꽃잎이 네 장이다. 사진을 여러 컷 찍는 와중에 갑자기 이팝나무에서 어릴 적 엄마가 해 준 쑥버무리가 스쳐 간다.

초등학교 입학 전이었다. 꽃샘바람을 등지고 엄마와 나, 할머니는 들판에서 쑥을 뜯었다. 어느 정도 쑥이 소쿠리에 수북이 쌓이면 집으로 돌아와 깨끗이 다듬고 씻어서 밀가루를 입힌다. 여린 쑥은 몽글게 흩어진 하얀 밀가루를 뒤범벅 뒤집어쓴 채 찜기로 들어간다. 포슬포슬 막 쪄낸 쑥버무리를 채반에 옮긴 후 한 김 나가길 기다린다. 터덜터덜한 쑥버무리를 툭 떼어 한 입 넣으면 쫄깃함과 풋풋한 향내가 입속에서 은은하게 맴돈다. 약간의 소금과 인공 감미료인 뉴스가로 간을 해 슴슴하면서 순한 맛이다. 나는 성긴 쑥버무리를 손끝을 모아 꾹꾹 눌러 작은 공처럼 뭉쳐서 먹었는데 그러면 푸석거리지 않고 씹는 맛이 더 찰졌기 때문이다.

우리 가족은 엄마가 해 주신 따스한 봄의 기운을 해마다 먹었다. 여린 쑥이 뜨거운 김을 만나 진초록으로 짙어지고 하얀 밀가루가 숭덩숭덩 붙어있는 모양이 마치 이팝나무를 꼭 닮았다.


그리운 기억은 어디에서 오는 걸까. 유대를 돈독하게 이어주는 삶의 원천은 어머니가 해 준 음식이다. 추억이 소중하면 그 음식도 각별해진다. 음식은 먹는 즐거움뿐 아니라 함께 했던 사람까지 데려온다. 음식을 사이에 두고 함께 나눴던 이야기들, 마주 보며 짓던 웃음과 몸짓, 그날의 분위기와 온도까지 함께 건너와 추억의 기갈을 달래준다.

오월의 눈꽃 이팝나무가 어머니를 데려왔다. 뜨끈한 김이 모락모락 피어나던 명주 천을 채반에 옮기며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으시던 내 그리운 엄마가 저 멀리서 오고 있다.

keyword